나는 사후세계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내 숨이 멎고 먼지로 돌아가면 세상도 숨 쉬는 것을 멈추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온 세상은 고요하고 깜깜해질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끝. 세상이 내가 살든 죽든 실제로는 바쁘게 굴러간다고 해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 죽고 다면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을. 내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추억한다면? 아무도 먼지로 돌아간 나를 기억하지 않는 것보다는 좀 낫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죽고 나면 끝이다. 혹은 내가 역사책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다면? 죽고 나면 그것도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돈, 몇 평짜리 아파트, 차, 명예, 살면서 쌓아온 추억, 나의 생각, 글, 우정, 심지어 사랑, 전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을 나누고, 풍족함과 뿌듯함을 즐길 육체와 정신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그래서 이 세상에 부재한다는 것이 정말 싫다. 죽음은 마치 내 생일파티에 나 빼고 나머지 친구들이 싸그리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은데.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고, 보아야 할 풍경이 얼마나 많고, 봐야 할 영화에, 누려야 할 꿈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주말 아침의 꾸물거림과, 카페라떼의 향기와,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처음 듣는 노래의 멜로디. 사랑하는 사람의 촉감, 친구들과 나누는 십 분이면 잊어버릴 하찮은 잡담. 물론 이 세상도 내 삶도 아름답고 빛나는 것만으로 가득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파티에 매년 다시 초대되고 싶다.
나는 영생을 꿈꾼다.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당연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함께! 세상과 기술이 몇 년 새 이렇게 빠르게 변했는데, 인류의 노화와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순간이 나 눈 감기 전에는 오지 않을까 하는 오만한 영장류가 되어보기도 하고,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면 아마 그 기술은 비싸지 않을까. 아마 부자들이 먼저 상용화된 생명연장의 혜택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지금부터 돈 미리미리 많이 모아둬야겠네? 하는 덧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렇게 오래오래 살고 싶다면서 밀가루와 알코올에 눈 돌아가는 것은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인간은 원래 모순덩어리이고 불완전한 동물이라는 진리를 몸소 실천하기 위한 철학적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내가 어리석어서는 절대 아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그때까지 나는 죽음이란 것을 완전히 삶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죽음은 언젠가 우리를 잡아챌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죽음이 우리를 움켜쥐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게 붙잡히지 않는다.'라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편에 있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날 밤을 경계로 이미 나는 죽음을 (그리고 삶을)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인 존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이미 갖추어졌고, 그런 사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죽음과 이별들로 가득하다. 함께 당구를 친 날 갑자기 죽음을 택한 기즈키, 아무 말 없이 떠난 방을 빼고 떠난 룸메 특공대. 나오코와 레이코. 외국으로 떠난 나가사와. 깊은 밤 잠시 스쳐간 이들. 와타나베가 마음을 주었으나 몸의 병으로, 마음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끼는 이들.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국내로 번역본이 들어온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말해주는 삶의 한 측면. 우리는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며 살아간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었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이별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삶을 스쳐갔다. 그때마다 나는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원래 담임을 맡고 계시던 선생님께서 몇 달간 육아 휴직을 하게 되셔서 조금 나이가 많은 할머니 선생님이 우리 반 임시 담임으로 오셨다. 근데 둘이 영 케미가 안 맞았다보다. 아니, 케미가 안 맞았다기보다는 내가 말썽을 피우고, 그 임시 담임 선생님은 나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셨으니 일방적으로 그 선생님을 열 받게 하는 존재가 나였을 것이다. 교실 뒤에 가서 나무 의자를 머리 위로 들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방과 후에 남아 기름걸레로 바닥을 청소했던 기억도 나고. 아마 회초리도 맞았을 것이다.
원래 담임 선생님께서 휴직이 끝나고 돌아오시자 임시 담임 선생님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셨다. 마지막 날 종례를 하면서 임시 담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자, 알 수 없게도 눈물이 펑펑 나왔다. 미운 정이 든 건지. 아니면 종례사를 아주 감동적으로 짜서 오셨던 건지. 교실에서, 복도에서, 계단에서, 집에 가는 내내 숨이 넘어가라 울어서 집에 가자 엄마가 놀랐던 것 같다.
그 뒤로도 그랬다. 나는 사람과의 이별이 많이 아팠다. 이별은 그 사람과 공유한 내 삶과 기억의 일부가 지워지는 것이다. 소중한 기억을 나눌 사람이 없으니 그 의미를 상실한다. 곧 내가 지워지는 것이기에 그리도 아팠던 것 같다. 그때는 마치 그 친구, 그 연인이 아니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깊은 관계를 맺어본 경험도 잃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 인연과 추억이 소중했고 그들과의 관계가 끝나면 나의 일부가 삭제되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내 기억과 그때의 감정을 나눌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도 생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이별이 있으면 만남도 있는 것이었다. 이별의 고통이 가득 채웠던 자리를 망각하고 난 공터에는 새로운 사람이 터를 잡기 마련이었다. 놀랍게도 그 사람이 내 삶에 없어도 세상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인연이 지나가면 항상 다른 인연으로 내가 채워졌다. 게다가 이별한 사람과의 추억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스쳐간 친구, 연인, 지인과의 대화, 감정,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나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기 전과 후의 나는 분명히 다른 인간이다.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는 관계, 심지어 한두 번 보고 말 사이라도 그 사람의 흔적이 나에게 남는다. 그 모든 순간들이 생각보다 일시적이지 않고, 생각보다 덧없지도 않다. 그러니 나는 마주하는 모든 인연, 순간을 즐기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맞닿는 매 순간 서로를 창조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별은 가장 거세게 두 인간이 부딪히는 순간이다. 그 충돌로 인해 둘은 찢어지고 갈라지겠지만, 그들은 그 상처로부터 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빛나는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나오코와의 이별은 와타나베에게 정말 큰 고통이었지만, 미도리를 놓치지 않을 용기를 갖게 해 주었다. 나 역시 사과하는 법, 용기를 내는 법. 내가 함께 있을 때 행복할 사람은 누구인지. 이런 중요한 것들을 소중한 이와의 이별이 없었다면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이별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이제 이별에 감사할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의, 또는 주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가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좀 이상한 걸까? 어찌 보면 이별도 죽음도 상실이라는 한 단어의 다른 모습일 뿐인데. 한 친구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더 빛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끝이 있기 때문에 더욱 희소한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그는 끝이 있는 사랑이야기가 더 빛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이건 그냥 그 친구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그래서. Call me by your name이 딱 그런 느낌이다. 빛나는 여름을 적신 사랑! 하지만 현실적 이유로 사랑은 이뤄질 수 없고... 벽난로를 조용히 바라보며 그를 그린다. 뭐 이런 감성 있잖아. 근데 난 그런 플롯도 아련하고 좋지만 Happy ever after의 열린 결말이 더 좋다. 삶은 계속되고,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영원히! 하지만 내가 아직 미성숙한 탓인지, 그다음이 없는 상실. ~덕분에가 붙을 수 없는 상실인 죽음을 가뿐히 받아들일 준비는 되지 않은 것 같다.
*1 몇 달간 사놓고서 묵혀뒀던 책이다. 상실의 시대가 원제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아직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서점을 돌아다니다 그냥 표지가 눈에 들어와서 쉽게 산 책이다. 책 읽는 거 좋아한다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안 읽어봤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책을 엄청 폭넓게 읽는 편은 아닌가 보다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 변명이라면 외국 문학을 잘 읽지 않게 된 것이, 번역가의 수준에 따라 책의 수준이 너무 들쭉날쭉하게 변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원어에서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너무 직역해서 별나라 외계어로 만들어버리거나, 너무 의역해서 원문의 맛을 크게 훼손한다거나 하는 것이 싫어서 그럴 걱정 없는 한국 소설을 주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말과 일본어의 어순이나 문법 등이 비슷해서인지 몰라도 이 책, 노르웨이의 숲은 문장이 부드럽게 술술 잘 읽혔다. 편식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 소설을 좀 더 읽어볼까 생각도 든다.
*2 그냥, 좋았단 구절 몇 개.
"잘 지내나요? 당신에게 나오코는 지고의 행복과도 같은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냥 눈앞에 있는 사는 게 서투른 여자애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럭저럭 때에 맞게 스웨터 하나를 완성했네요. 어때요, 멋지죠? 색깔하고 모양은 둘이서 정했어요. 생일 축하해요."
"대체 왜 그러는데?" ... "그게 네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거야?" "응." "어이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시간을 조금 떼어 내서 그 속에서 널 재워 주고 싶을 정도니까."
"근데, 넌 어떻게 그런 사람만 좋아하는 거야? 우린 다 이상하게 비틀리고 꼬여서 버둥거리기만 하다가 점점 깊은 물에 가라앉는 사람들이야. 나도 기즈키도 레이코 씨도. 모두가 그래. 왜 좀 제대로 된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거야?"
"그건 내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너도 기즈키도 레이코 씨도 이상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내 눈에 좀 이상해 보이는 인간들은 모두 당당히 바깥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지."
"우리에게도 아주 정상적인 부분이 있어. 그건 우리는 스스로 비정상이란 걸 안다는 거지."
*3 몇 달간 글이 잘 쓰여지지 않았다. 첫 직장에 들어가는 등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올해 겪은 일들이 아직 내적으로 다 소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글로 쓸 만큼 내 생각이 숙성될 충분한 경험과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