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장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
당신은 직장을 선택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한 조사에 따르면 66%정도가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을 선택했다고 한다. 공정한 보상, 안정성, 복지, 수평적인 분위기 등 여러 항목을 제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직장 선택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는 워라밸이다.
많은 사람들이 워라밸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어찌보면 그만큼 그들의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근로시간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공무원, 직장인들의 과로사에 대한 뉴스가 하루가 멀다하고 전파를 탄다. 52시간제 52시간제 하는데, 단순히 5일 근무로 따져보면, 9시 출근한 직장인이 6시까지 일하면 40시간이다. 7시까지 저녁 먹는다 치고, 매일 9시 반까지 야근하면 대충 52시간 채워진다. 9시반 이후에 퇴근하고 나면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누워서 유튜브나 넷플릭스 좀 보다가 자는거지. 그 와중에 52시간제 완화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갑갑하다.
2.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내게 갖는 의미
한편으로, 회계사라는 직업의 근무특성상 워라밸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연말연초 가장 바쁜 피크시즌에는 80시간 넘게 일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보다 훨씬 더한 사람들도 많다. 근무시간도 시간인데, 비시즌에도 퇴근 후에 아주 맘 편히 쉬기는 힘들다. 노력은 하는데, 워크와 라이프의 완전한 분리가 쉽지 않은 것이다. 업무 진행 상황에 따라 퇴근 후에 연락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빈번하고, 주말에 머릿속에서 일 생각을 완전히 비우기가 힘들다. 뭐 해야 할 것 없나? 뭐 놓친 것 없나? 그거 언제 하지? 이런 생각으로 가득하다. 요즘은 적응이 되면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처음 입사했을 때는 불안해서 어디를 가더라도 회사 노트북을 들고 다녀야 했다. 혹시나, 만에 하나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삼십분마다, 한시간마다 연락 온 것 없는지 노트북을 들춰보곤 했었다.
그러다보니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워라밸이라는 단어와 참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 회계사니까. 주말에 일 생각 안 하고 푹 쉬고, 가끔은 주중에 친구들과 약속도 잡고, 저녁에는 집에서 밥을 먹고. 휴식, 가족, 친구, 취미 그런 것들은 삶에서 참 소중한 부분이다. 워라밸 없이는 도무지 가질 수 없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워라밸이라는 단어에 갇혀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3.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
작년에 팀을 옮기면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워야 했다. 그전에도 관심은 있어 조금씩 공부하곤 있었지만 많은 적응이 필요했다. 업무자동화, 데이터분석, 파이썬, VBA, 데이터베이스 이런 생소한 단어들과 친해져야 했다. 그러다보니 재미를 느끼면서도 스트레스도 압박감도 심하게 받았다.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 팀에 많다보니 나도 더 잘해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치면서도, 배워야 할 건 많고, 할 일도 많고, 그러면서도 쉬고 싶고 지치고. 그러다보니 "일"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내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왜 열심히 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일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삶의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 어느정도까지 타협을 할 수 있을지. 언제나 그렇듯 잡생각이 너무 많았기에 모든 나의 결론을 이 하나의 글에 풀어놓기엔 난잡할 것이다. 그 여러 잠정적 결론 중 하나는, 내게 있어서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멋진 일을 하기 위해선 너무 당연하게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잘하고 싶다면, 저녁에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하는게 너무 당연하다. 그런 노력 없이 어떻게 더 즐거운 일을 하고, 더 뛰어난 업적을 세울 수 있을까? 워라밸이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의 나에게? 지금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새로 배우는 입장인데, 내 욕심에 걸맞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당연히 스스로를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여선 안될 것이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괴롭혀가면서까지 달린다면, 지쳐서 중간에 주저앉을 것이다. 다만, 쉴땐 쉬고 놀때는 놀더라도 욕심이 많아서 잘하고 싶어서 스트레스는 받으면서, 그에 걸맞는 노력은 안하고 있는게 이상하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한다.
4.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정말 워크&라이프 밸런스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일과 삶이 분리가능한 것일까? 워라밸이 지켜지는 직장이라고 하면, 9시에 시작해서 6시는 일의 시간이고, 평일 6시 이후로, 그리고 주말에는 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내 삶의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인간으로서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시간의 몇퍼센트를 진짜 살아있는 것일까? 그럼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9 to 6는 누가 살고 있는 걸까?
직장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일에서 그런걸 찾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네 삶은 6시 이후에 찾으라고. 정말 6시 이후에 삶이 시작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비참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는 직장을 찾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그만큼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기회가 적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후 6시 이전의 시간을 내 삶에서 모두 지워버리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 비루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 일이 싫지는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이걸 배부른 소리 치부하기엔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크잖아.
워라밸이라는 단어에 갇혀서 내가 더 잘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덜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나 6시 넘었는데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이런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다. 분명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6시가 지났다는 이유로 해야 할 일을 질질 끌게 되고, 필요한 공부를 덜 하게 된다. 그럼 스스로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니 그럼 욕심이나 부리지 말든가... 그래서, 어차피 욕심을 부릴 거면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물론 이건 나의 특성과,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개인적인 결론이다. 누구나 사람마다 중심점이 다르다. 일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친구, 취미, 가족, 이런 것들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누구나 다르다. 일에 대한 욕심의 크기도 다르다. 나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일에 대해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이외의 부분이 내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직장에서도 잘하고, 인정받고 싶다는 의미에서. 성취로부터 얻는 행복감, 오늘의 할 일을 끝냄으로써 얻는 뿌듯함 역시 내 삶의 큰 부분이다.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조직적인 차원에서는 당연히 구성원의 개개인의 저녁 있는 삶이 지켜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휴식은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직업적으로 이루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워라밸이라는 단어에 갇혀서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또는 내 더 나아진 미래를 위한 투자인 공부를 쉬어야 할 시간에 한다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별생각 없이 할일 열심히 하는 게 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