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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Aug 18. 2024

퍼펙트 데이즈

짧은 글 3. 2024년 8월 18일

1. Rock n Roll!

이번 주말에 내게 가장 큰 행복 준 일. 엊그제 주문한 내 첫 일렉기타가 도착했다. 30대의 첫 해를 시작하며 야심차게 세운 목표. 내가 30대 10년 동안 몰두할 수 있는 3가지의 취미를 찾겠다는 것. 마음에 여러 후보가 스쳐갔으나 가장 먼저 첫번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기타, 그 중에서도 일렉기타다.


대학생 시절에는 어쿠스틱 기타를 꽤 열심히 쳤었다. 어쿠스틱기타 동아리에 들어가 곡도 쓰고, 가사도 쓰고, 만든 노래로 버스킹과 공연도 여러번 해보고. 썩 잘하진 못해도 곡을 쓰고 기타를 연습하는 것이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다 현생이슈로 어느 순간 조금 시들시들하더니 바쁘다는 핑계로, 언젠가 쳐야지 하는 말만 하며 몇년동안 집에 기타만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러다 올해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언젠가 해봐야지 생각만 하던 일렉기타를 배워보려 집 근처 학원을 끊어 두세달정도 배우던 참이었다. Coldplay, Nirvana, Oasis, 검정치마...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곡을 몰입해서 연습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운 곡을 흥얼흥얼, 손가락 까딱대며 복습. 즐겁다. 새로운 걸 배우고 현재에 몰입하는 이 순간이 소중하다.


2. 퍼펙트 데이즈

무려 124분, 2시간이 넘는 영화지만 별다른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 하루하루가 왜 이리 아름답고 충만해 보이던지.


히라야마는 옆집 아주머니의 빗자루 쓰는 소리에 잠을 깬다. 어제 보다 잠든 책을 치우고, 이불을 갠다. 양치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서 차키와 동전을 챙겨서 집을 나선다. 문을 나서자마자 하늘을 보고, 날씨를 확인한다. 캔커피를 하나 사서 차에 오른다. 출근하는 길, 도쿄 스카이트리가 보이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오늘 듣기로 마음먹은 카세트테이프를 밀어넣는다. 시내 곳곳의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최선을 다해서 닦고 정리한다. 가끔 청소부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있어도 괜찮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나의 일이므로 최선을 다하고, 깔끔해진 화장실을 보며 뿌듯함을 느낀다. 공원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하늘을 본다. 날씨가 좋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필름카메라에 담는다. 퇴근하고 나서는 항상 그렇듯 자전거를 타고 공중목욕탕에 가서 몸을 깨끗이 씻고, 단골 식당에서 하이볼을 한잔 마시고 집에 돌아온다. 집에 와서는 누워서 책을 조금 읽다 잠이 든다. 다음날의 빗자루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히라야마의 하루에 행복한 삶의 모든 조건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잘 맞는 매일매일의 루틴. 같아보이지만 매 순간 다른 햇빛, 하늘, 바람을 온전히 느끼는 감사함.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며 느끼는 뿌듯함. 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자에게까지도 건넬 수 있는 친절함과 관대함.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나의 취향. 단골 가게에서 술 한잔 하며 오늘의 피로를 풀 수 있는 마음의 이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꽉꽉 차있는 완벽한 하루들.


3. 코모레비

기타에 몰입하는 시간은 나만의 퍼펙트 데이즈를 만들기 위한 벽돌 하나다. 잘 치지 못해도, 욕심내지 않고 차근차근. 좋아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일로 채운다.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해서. 속 삑사리가 나도 연습하는 그 순간에 몰입하고, 느려도 조금 나아졌음에 감사하고 뿌듯함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들로 오늘을 채우기 위한 정성스러운 마음들. 기타 연습하기, 오늘의 아침 루틴 지키기, 굳이 번거롭게 요리해서 먹기, 피곤해도 운동가기, 명상하기, 가족, 친구와 보내는 시간, 글 쓰기. 그 밖에도 자연, 친절, 사랑, 연민, 이완, 여행, 뿌듯, 몰입, 바다, 구름, 하늘, 대화...


코모레비こもれび.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뜻하는 일본어. 매일 같은 장소, 같은 나무라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매 순간 새롭고 고유하다. 마치 우리의 매일매일처럼. 어떤 렌즈를 끼고 보느냐에 따라 같은 하루도 지루하고 괴로울 수 있고, 소중하고 빛나는 하루일 수 있다. 하찮아도 오늘은 살면서 딱 한번 뿐인데.  내게 단 한번 뿐인 오늘을 다정하고 정성스레 대하고 싶다.


행복은 가진 것이 많아야, 대단한 것을 이뤄야 자격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없고 지루한 하루를 보내더라도 나뭇잎 사이에서 문득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중요한건 매일 지나치는 수많은 코모레비들을 알아볼 수 있는 해상도 높은 마음의 렌즈를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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