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이유로 '물성'을 빼놓을 수 없다. 모니터든 이북이든 스크린으로 볼 때 느낄 수 없는 질감이 종이책에는 있다. 하나라도 더 많은 감각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독서를 '한층 깊이 경험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통한다고 믿는다. 책을 사기 위해 부러 서점에 들르는 이유다. 마침 살 책이 두 권 있었고, 공교롭게도 모두 교보문고 영등포점에만 재고가 있어 퇴근 후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해까지 영등포구에 주기적으로 들를 일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여의도동에 자주 갔는데, 같은 구 안에서 붙어 있는 동네임에도 영등포동과 여의도동은 사뭇 다른 풍경을 띤다. 여의도동이 공원을 중심으로 탁 트인 평지에 마천루가 모인 빌딩 숲을 정갈하게 그룹화한 모양이라면, 영등포동은 타임스퀘어 같은 고층 건물이 성기게 솟아난 틈으로 노후화된 낮은 건물들을 마구잡이로 채운 듯한 형상이다. 교보문고 영등포점은 영등포동에 있었고, 나는 여의도동보다 영등포동을 걷는 게 더 좋다. 여기에는 사보 기자 시절, 취재처가 여의도동 소재였던 탓도 작용한 듯하다. 한 번도 여유롭게 누빈 적 없던 길은 시간이 흘러도 당시의 조급함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책을 사서 나오며 골목을 걷다가 영등포 시장 입구를 보았다. 저녁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는 본능에 직감적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전라도 음식을 암시하는 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예전부터 먹겠다고 결심했던 홍어무침이 떠올랐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계속 기회만 노리던 차였다. 자리를 잡고 잔치 국수와 소주 한 병을 함께 시켰다. 홍어무침은 예상보다 덜 새콤했고, 더 딱딱하여 원하던 맛에 미치지 못했다. 다음날 먹으면 제맛이 돌 것 같아 남은 것을 포장했고, 안주가 끊기면서 소주병에는 두 잔 정도의 양이 남았다.
집 가는 길에는 올리브영에 들러 비타민C를 샀다. 부쩍 나날이 풀리지 않는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그간 미뤘던 메가도스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던 참이다. 피곤함에 따라 수염이 굵어지는 느낌이 드는 한편,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무딘 면도날이 떠올랐다. 검은 봉지 안 홍어무침 포장 용기 위로 비타민C와 새 면도기가 담겼다.
이날 나를 걷게 한 것은 '잊히기 직전까지 미루던 일을 해치우려는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