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찾아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금 익숙해진 아로마 향이 희미한 바람에 실려왔다.
아이필로우와 담요를 챙겨 매트 위에 앉았다.
세 번째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텅 비어 허전했다.
첫날의 고요는 그대로였지만,
그 고요 속 함께 있던 무언가는 없었다.
허상이었을까.
드문드문 생각이 났지만,
그것만으로 토끼를 붙잡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그건 분명 어떤 꿈처럼 다가왔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다시 한번 보면 그렇게 놓치지는 않을 텐데.
그날 이후 몇 번이고 마음속에서
그 장면을 재생했다.
이따금 집에 들어가는 길에,
그날의 공기가 되살아났다.
그저 상상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그날의 고요가 머물러있었다.
쉬이 떨쳐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느끼지 못한 ‘무언가’가
내 안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토끼를 생각하며 양발을 맞대고
나비자세로 허벅지의 뻐근함을 온전히 느꼈다.
토끼를 만났던 그날의 고요는 그대로이면서도,
어쩐지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하’는 태양, ’타‘는 달.
서로 다른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는 하타요가.
무리한 움직임 없이
호흡에 맞춰 흐르듯 이어지는 동작들.
한 동작에서 이리 오래 머무는 건 처음이었다.
고요히 흐르는 시간 속에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내 몸의 모든 땀구멍이 다 열린 듯
송골송골 땀이 새어 나왔다.
무거운 뻐근함과 미세한 떨림.
그 끝에 묘한 시원함이 몰려왔다.
브륵샤사나.
나무자세라는 이름에 맞게,
나는 이제 막 땅에 뿌려진 씨앗인 양
오른 발가락에 힘을 꽉 움켜쥐고
매트 위로 뿌리를 내렸다.
휘청이는 내 몸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는 거 아닐까.
무작정 생기는 낙관이 아니었다.
예전의 나는 흔들리면 무너졌고,
무너지면 주저앉았다.
하지만 오늘은 천천히 버텨보았다.
지금 이 시간만큼은, 정말로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몸은 흔들렸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그 작은 차이가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었다.
흐르는 땀방울이 조금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땀에 절은 얼굴은 엉망이 되어갔지만,
입가에 떠오르는 옅은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흔들리는 발끝처럼
여전히 내 마음도 불안정했지만,
그 안에서도 중심은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들리며 내린 뿌리 위로,
나는 눈앞의 한 점에 문을 만들었다.
그 점을 응시하며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고요한 나의 공간으로.
하얀 벽 너머의 공간은 영화 속에 나오는 숲 같았다.
나는 맨발로 조심스레 흙 위를 걸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혔다.
고개를 들자 초록빛 은하수가
내 눈앞에 별처럼 쏟아졌다.
편백나무 향이 내 몸을 안아주었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는 오랜만에 들은
살갗 위의 위로처럼 다정했다.
그곳에서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머리가 맑아지며 내 안에
깊이 침잠해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키보드 위로 쏟아졌던 고민,
모래주머니 같던 퇴근길,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꼭 잡았던 지나간 기억들,
눈물로 지새운 수많은 밤.
그리고 그 안에 잔뜩 움츠린 내가 있었다.
온몸이 짙은 한숨으로 꽉 차 터질 것 같았던 나.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채
까만 그림자 위에 우두커니 서있는
지난날의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간 일들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어쩐지 평소처럼 뭔가에 찔리 듯
아프지는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이
날숨과 함께 나에게서 천천히 빠져나갔다.
계속해서 부드러운 흙을 느끼며 앞으로 걸어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몸을 흔들며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작은 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나를 따라왔다.
저 멀리 나무 사이로 하얀빛이 보였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을 타고 새로운 공기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용기를 내 발을 디딘 새로운 우주,
딱딱한 내 마음을 열어준 온기.
까만 그림자 위에 기력 없이 서있던 나는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그림자 바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매트 위에서 만난 하얀 토끼.
저 멀리 하얀빛 아래에서 토끼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떴다.
현실의 벽은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창문 너머로 선선한 공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시 펜을 들 힘이 생겨났다.
오늘 토끼는 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그 희망을 내 현실로 불러올 수 있으리라는 것도.
마지막으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나는 내 폐의 크기를 가늠해보기라도 하는 듯
들숨의 결을 만져보았다.
나를 찔렀던 파편 하나가
뚝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그 자리에는 아까 내린 씨앗이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토끼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숨의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날의 토끼가 ‘숨’이었다는 걸,
나는 천천히 이해해가고 있었다.
나는 아주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고,
‘숨’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숨에 용기를, 날숨에 과거의 나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