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숨으로 흘려보낸 것 2._2023년
나는 옷을 좋아한다.
예쁜 옷을 보면 당장 입고 한껏 꾸미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 취향인 모든 옷을 소화하기에
내 신장은 조금 (많이) 안타까운 편이다.
키가 작을수록
바지 쇼핑이 많이 까다로운데,
핏, 기장감, 밑위, 밑단,
엉덩이 포켓의 위치까지
어느 하나 신경 쓰지 않을 것이 없다.
바지 하나 고르는데도 이렇게 공을 들이는데,
먹고 사는 일은 오죽하겠나.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구시대적 산물이 되었지만,
어떤 업무를 하는 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당연히 유효했다.
20대 후반에 접어들던
나의 첫 직업은 ‘헤드헌터’였다.
내 식대로 짧게 정의하자면,
‘남 좋은 일 찾아주는 커리어 전문가’였다.
(참고로, 난 세상의 모든 직업인들을 존중하고
헤드헌터를 존경한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또 그만큼 보람 있는지
짧은 경험으로나마 알기 때문이다.)
뭣 모르고 채용 업무에 뛰어든 나는
곧 거대한 직업의 세계에 빠졌다.
평생 산에서 나물만 먹다
난생 처음 도시의 아이스크림을 먹은
아이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나에게도 ‘직업’과 ‘갈 곳’이
생긴 게 마냥 기뻤다.
이 세상에 우리 집 말고
내 자리가 있다는 게 신기했고,
매일 지옥철에 몸을 실으며
평범함을 누리는 것 같아 뿌듯했다.
내가 느낀 작은 행복감은 딱 여기까지였던 것 같다.
내 또래인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이력서에는
유독 스크롤이 느리게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출신 학교, 대외활동, 자격증, 인턴 경험 유무,
고용 형태, 현재 연봉 등 이력서 한장으로
그들의 인생을 그려보았다.
그들은 무지개 빛으로 찬란했다.
어쩜 그리 잘 맞는 업을 골랐을까.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결이 맞아 보였다.
그 사실이 신기하고 멋있었다.
특히나 내 시선을
오래 붙잡아둔 건 포트폴리오였다.
나와 동갑인 그녀의 포트폴리오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있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기획 PM인 그녀는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알기 쉽게 본인의 업무 프로세스를
시각적으로 잘 정리해 두었다.
그녀가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어떤 업무를 맡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그 모든 고민과 노력과 결과가 수치화 되어 있었다.
나는 감각적이면서도 실용적인
포트폴리오 구성에 한 번,
유의미한 수치에 두 번 놀랐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담당하는 회사를 권했을 때,
본인의 커리어에 대해 확신 있지만
겸손한 어투로 답하던 목소리 또한 생생하다.
퇴근길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에서,
나는 잠시 ‘타인의 삶’에 들어가 보았다.
건강하게 10대를 보내고 제대로 수능을 봤으면,
내가 뭘 잘하는지 대학 4년 내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혀 봤으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내가 기획한 걸 실행하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녀처럼.
이번 역은 군자, 군자역입니다.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발걸음을
옮기는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지하철 속 군중 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순간 두 귀에 약간의 화끈함이 올라왔다.
혼자만의 상상이었을 뿐인데,
어쩐지 부끄러웠다.
이 환승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옷은 예쁘긴 했지만
내 몸에 맞지 않았다.
바지로 치면 길이가
너무 길어 질질 끌렸고,
자켓으로 보자면
어깨가 너무 커 쌀 포대기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어느 방향의 지하철에
몸을 싣고 땅 아래를 달리고 있는걸까.
새카만 어둠 속 유리창에 반사된 내 모습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행인 1.
그게 나였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의 나는,
선명한 원색보다는
조금은 흐릿한 색이 더 어울렸다.
용기를 내기엔 아는 게 하나도 없었고,
한 발짝 떼기엔 눈 앞이 캄캄했다.
이제야 익숙해진 익숙함, 미약한 안정감.
그토록 갈망한 평범함.
내려놓을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자칫 모래성처럼 무너질까 두려웠다.
그러니까, 그 모든 마음이 파스텔 빛이었다.
희미하게 무언가를 동경하지만,
선명하게 손에 잡을 수 없는 것.
그렇게 나는 반 쯤은 희미한 마음으로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 춤을 추는 날들이 많아졌다.
내 색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로,
누군가의 색만 흘깃하던 날들.
결국은,
선명한 색을 두려워하던 건 나의 마음이었다.
파스텔 빛은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