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 앞에서 망설이던 순간_2023년 여름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참치 회 먹으러 가실래요?’
내 생일은 장마 시즌과 겹쳐
종일 빗소리로 시끄러웠다.
바쁘게 일하며 키보드를 타격하던
내 손가락을 멈춘 건 그의 카톡이었다.
그해 생일을 축하해준 이들 중
가장 의외의 인물이었던 그는,
축하한다는 메세지와 함께
대뜸 참치회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사랑의 상흔에 허우적거리던 나는,
‘이제부터 가는 사람 안 붙잡고
오는 사람 안 막겠다’는
흔한 결심을 어설프게 실천하던 중이었다.
그래도, 모임에서 얼굴 몇 번 스친 이에게
조금은 과한 생일 선물을 받은 것과 함께
‘단둘이’ ‘참치회’라니.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모임에서 본 그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나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주말의 한남동, 참치회.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그렇게,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낯선 이와 맘 편히 밥 먹는 게 부
담스러운 나와 달리,
그는 참 복스럽고 맛있게 ‘참치회’를 해치웠다.
참치가 너무 좋다며,
부디 멸종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참치가 있다면 지구 끝까지 갈 기세처럼 보였다.
나와의 시간이 아닌
정말로 ‘참치회’가 먹고 싶어 온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긴장이 풀리며
살짝 웃음이 나왔지만,
그땐 그냥 거기까지 였다.
그렇게 그와 나는
영화관, 미술관, 여름 밤의 한강을 몇 번 더 거닐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남녀의 ‘썸’처럼 보였을 거다.
하지만 내 옆에는 항상 지나간 얼굴이
진득하게 붙어있었다.
벅벅 긁어내도 자고 일어나면
늘 제자리에 희미하게 있었다.
조심스럽게 나를 힐끔거리며 계속 미소 짓는 그를,
애써 못 본 척 했다.
그 눈빛에 담긴 뜨거운 감정이 읽혔지만,
나에게 던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그와 나는 같이,
동시에 따로 걸었다.
그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답지 않게 순수했고,
사회에 닳은 어른 치고 조금 허술했다.
그는 도통 자신의 마음을 감출 줄을 몰랐고,
거침없는 와중에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순수함과 용기가 부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내심 그가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허락한 건
딱 ‘사회적 친절함’까지었다.
몇 번의 연락 끝에,
나는 그에게 이별 아닌 이별을 고했다.
내 아픔 고치자고
그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렇게 이기적이지는 못했다.
나를 위한 것보다 타인에게 착한 편이 나았다.
제대로 만난 적 없는 이와의 헤어짐도 이별이라고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갈비뼈 사이사이를 채웠다.
뜨거운 여름의 모든 숨이
내 안의 무기력을 달궜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것도,
결국 감정이었다.
모든 것이 지루했고,
사랑은 지겨웠다.
그의 순수한 애정은 나름 귀여웠지만,
한여름에도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이지는 못했다.
더 이상 나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심장이 더 딱딱해져서
아무 것도 못 느끼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진부한 생각을 하며 매일 밤 눈을 감았다.
우습게도 먼저 연락을 한 건 내 쪽이었다.
그의 수술 소식에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가 나에게 생일 축하를 한 것과는
다른 마음이었지만, 나는 조심스레 안부를 물었다.
‘수술 받으셨다는 얘기 들었어요. 괜찮으신가요?’
그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아지처럼,
동시에 조심스럽게 날 반겼다.
그의 애정 어린 눈빛과 미소는 여전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그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편한 것도 아니었지만.
모두와 편한 사이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드문드문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걸었던
그와 나는 흰 눈이 비처럼
내리는 11월이 되어 다시 마주했다.
수술로 제법 고생했는지 전보다
야윈 그가 어쩐지 낯설게 보였다.
한여름의 그가 마냥 신나 같이 놀자
안기는 강아지 같았다면,
롱 코트에 머플러를 두른 채 말없이 웃는 그는,
어쩐지, 조금 더 어른 같았다.
그는 나를 파주의 한 청음 카페로 데려갔다.
일상에 지쳤던 한여름의 내가,
가끔은 아무 걱정 없이
조용히 음악만 듣고 싶다던 것을 기억했던걸까.
큰 스피커로 음악을 감상하는 그를,
이번에는 내가 슬쩍 힐끔거렸다.
음악에 빠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심 알고 싶었다.
음악의 파동이 귀를 타고 심장으로 들어와
나의 혈관에 잔잔한 울림을 만들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나는 가랑비에 옷 젖듯 그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내 안에 그를 향한 질문들이 생겨났다.
계절이 바뀌도록 왜 나를 계속 생각했느냐고.
부끄럽지만 그처럼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노래 가사는 반쯤 맞았다.
새로운 사랑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지만,
그 사이의 공백은 제각기 달랐다.
나는 상처의 끝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까지 깊이 앓았다.
그리고 새로운 겨울의 입구에서,
여전히 음악에 빠진 그를 힐끔거리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어쩌면 우리, 꽤 자주 볼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