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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T's Homework

: 노스밴쿠버 여행기

by 낙타

일을 안 하는 날에는 집에만 있는 나를 사장인 T는 가만두고 볼 수 없었나 보다. 어느 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T가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좋아! 주말 바로 전에 금요일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1) Lansdowne 스카이트레인 역에서 Canada Line을 타고 Waterfront Station으로 가.


2) Seabus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서 Seabus를 타고 Lonsdale Quay(노스밴쿠버)로 가. Seabus는 한 곳에만 가니까 길 잃을 걱정은 하지 마!


3) Seabus가 Lonsdale에 내려줄 거야. Lonsdale Quay를 탐험해 봐, 그곳은 공공 시장이야. 하지만 음식 court에서 먹지 마, 별로고 관광객들이 많이 가. 그곳밖에 작은 상점들과 박물관, 카페도 있으니까 둘러볼 수 있어.


점심이나 저녁으로는 여기 중에서 아무 곳이나 가봐:

- Chop & Chew

- Seaside Provisions

- The Gull Bar and Kitchen

- Sempre Uno


모험을 좋아한다면, Capilano Suspension Bridge를 추천할 거야(버스는 Lonsdale Quay 바로 앞에 있어)... 하지만 첫 번째 혼자서 탐험하는 거니까 Lonsdale Quay에서 멈추는 걸로 할게 :)


너의 숙제는 Lonsdale Quay에서 셀카를 찍어 보내는 거야, 내가 네가 거기 갔다는 걸 알 수 있도록!


그리고! Lonsdale Quay에서 밴쿠버 시내 전경을 다 볼 수 있어!!!


그리고 숙제 두 번째는, 어디든 가서 음식을 먹고 그 음식과 함께 셀카를 찍어 보내는 거야. 네가 외출하고 영어로 대화했다는 걸 알 수 있게 lol




그렇게 나의 노스밴쿠버 여행이 시작되었다.


2025년 3월 20일 목요일


10:05 일지 시작. 집 근처 역 도착. Waterfront로 향함. 날씨 좀 우중충함. 그래도 비 안 옴. 하늘 예쁨. 내셔널스탠더드 회색후드, 자라 카고바지, 크로스백, 모멘텀 시계, 뉴발란스. 아침은 푸틴 먹음. 저번에 한 번 나갔다가 울면서 돌아온 기억이 있어서 좀 불안함.


10:39 워터프런트 도착. 여기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도 시버스를 탈 수 있는 곳이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됨. 스카이트레인 워터프런트역에서 워터프런트역 건물로 이동한 뒤 시버스 타러 감. 기분 생경함. 스팀웍스 맥주 먹고 싶음. 누가 버스킹함.


10:44 타기 직전. 시버스 타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주는 타이머 있음. 노스밴쿠버에 스노보드 타러 가려는지 보드 든 사람들이 간혹 보임.


10:46 시버스 탑승. 거대한 사각판 위에 지하철 의자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있음.


10:51 비 오는 것 같다. 창문에 물방울 맺혀있음. 어제 우산 말려놓고 그냥 두고 왔는데 젠장. 순간 시버스 창문으로 파도가 침. 순간 비가 오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음.


10:53 사실 어제 애인하고 싸웠음. 요 며칠 계속 싸웠음. 그래서 기분이 흐린 날씨보다 더 우중충한 듯.


10:57 도착함, 하차. 비 오면 안 되는데.


10:58 사진 찍음, 첫 번째 숙제 완료. 춥다. 비 안 오는 듯. 아냐, 조금 온다.


11:11 카푸치노 마심, 마켓 안에 있는 커피바인데 1989년부터 영업했다 함.


11:24 론즈데일 애비뉴 걷고 있음. 조금만 걸었는데도 숨참 힘듦. 운동해야겠음. 날씨 괜찮음. 비 안 옴. 중고가게 있어서 여기부터 들어가 볼 예정. 거리 상당히 예쁨.


12:37 할 거 없어서 캐필라노 현수교 가는 중. 처음으로 혼자 버스 타봄.


12:41 무슨 입장료가 80달러야.


12:44 현수교옴. 엄청 흔들림.


12:51 커피 마심. 오늘만 100달러 넘게 쓰겠네, 미쳐버리겠네 진짜.


12:52 왼쪽 콧볼이 계속 아픔. 안에서 뭐가 났나?


13:06 800년 된 나무 봄.


13:09 화장실 엄청 깨끗함. 캐필라노가 마음에 들었음.


13:42 다리 건너서 다시 나옴. Cliff walk 들어섬.


14:00 기념품 근처 가게에서 푸틴 시킴. 이거 셀카 찍으면 두 번째 숙제도 완료.


14:01 애인이 보내준 EMS 도착했다고 함. 집 갈 때 픽업하기.


14:54 애인이랑 전화해서 또 싸움. 버스 타고 다운타운 가는 중. 일지 종료.


일정이 종료된 후, 그렇게 얻게 된 몇 장의 셀카를 T에게 보내자 ‘네가 자랑스럽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나는 T가 그냥 똑똑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정하고 섬세한 면도 있구나 싶어 많이 놀라고 고마웠다. 다음 숙제도 내준다기에 기쁜 마음 반, 귀찮은 마음 반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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