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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A Breathable Day

: 오랜만에 살만한 하루였다

by 낙타

오랜만에 살만한 하루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맨 정신으로 에어기타 쳤으면 말 다한 거다. 애인 손을 잡고 항상 가고 싶었던 이자카야에 가서 생맥주와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진토닉 한 잔도 말았다. 오랜만에 내 몸과 내 정신이 한 줄에 가지런히 정렬된 느낌이 끝내준다. 꼬이고 묶여있던 기도가 마침내 탁 트인다. 숨이 쉬어진다.


애인과 이자카야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와 퀴어, 그리고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면서 언쟁을 벌였다. 오랜만에 가까운 사람과 벌인 언쟁이라 퍽 생경했다. 내가 십 년 넘게 몸 담고 있는 필드와 그곳에서 쌓아온 지식들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이제는 친구마저 아니게 된 수많은 사람들과 전국을 누비면서 목소리를 냈던 이십 대의 파편적인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던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앞으로의 나머지 전부를 정의해 버린 이야기들이 새삼 반가웠다.


최근 커크 월리스 존슨(Kirk Wallace Johnson)의 <깃털도둑>(박선영 옮김. 2019. 흐름출판)을 빌렸다. 내 취향에 딱 맞는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한국에 있을 때에도 알지 못했던 책을 밴쿠버에서 만날 줄이야.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흥미로운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낚시를 할 때 물고기를 유인할 수 있게끔 여러 가지 깃털을 모아 미끼를 만드는 플라잉 타이(Flying Tie)에 빠진 19살 소년 에드윈 리스트(Edwin Rist), 그가 영국의 트링 박물관(Tring Local Museum)에 침입해 299점의 새 가죽을 훔친 사건을 시작으로 저자는 이 사건에 얽힌 매듭을 하나씩 추적해 나간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을 놀라게 한 진화론의 또 다른 창시자 앨프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에서 시작해 멸종 위기 동물 보호 운동과 깃털을 탐하는 패션 산업과의 싸움, 영국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공예 작업으로서의 플라잉 타이 등등, 저자는 어떤 소년의 대담하고 충격적인 범죄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과 배경이라는 깃털을 가능한 많이 모아서 한데 엮어낸다. 고작 100쪽 정도 읽어놓고서 이런 감상이라면 남은 300쪽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새로운 카페에 취직을 했다. 돌고 돌아 찾은 이 자리가 단단한 돌바닥일지, 아니면 발 빠지는 늪일지, 그것도 아니면 걷기 힘든 모래사장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쨌든 내가 그나마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를 내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가서 청소부라도 했으면 좋겠어, 바리스타는 고사하고.” 밴쿠버에 갈 거라는 나를 축하해 주는 예전의 친구에게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8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커피를 뽑아 번 돈으로 분위기 좋은 이자카야에 가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나는 운이 좋아.” 이건 내가 행복한 상태일 때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다. “내 인생은 망했어.” 이건 내가 불행한 상태일 때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때 많이 남겨놔야 한다. 오늘은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만큼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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