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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리얼중독자 Apr 25. 2024

책의 맛

최선, 안간힘

‘쉬벌…….


시간이 도통 가질 않는다. 구내식당에서 먹은 순대의 짠맛이 입안에 맴돈다, 양치질을 했는데도. 탁자 위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킬락 말락 한다. 애타는 마음으로 다시 책을 편다. 책장을 잡은 손 사이에 땀이 차는 게 느껴진다. 손부채질을 하지만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책을 붙잡고 있다.


‘이러다 뒤지겄는디…….’


페이지를 넘기지만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갖은 애를 쓰며 단어를 노려본다. 그래도 벌써 1년 넘게 잘 헤쳐나가고 있었다. 훈련소에 입대한 게 재작년 7월이었다. 논문이 끝나자마자 보름도 안되어서 입대를 한 탓에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모포를 개고, 구령을 맞추고, 체조를 하고 있었다. 이 망할, 내가 왜, 하고 욕할 겨를도 없이 이어지는 생활.


내무반에서 눈에 띈 게 책이었다. 총기보관함에 얹혀있는 몇 권의 책들.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논문과 사회과학책으로 이루어진 참고문헌 목록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쇼코의 미소를 손에 쥐고 자리에 앉았다. 짧디 짧은 쉬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얻어내는 탐독의 순간. 이렇게 소설이 재미있었나. 연구방법과 연구질문과 연구대상만 주구장창 보던 내게 단편집의 문장이 꿀처럼 끈적하게, 쏟아지고, 흐르고, 차오르고.


다음날, 책꽂이에 다 읽은 소설책을 꽂아 넣으며 곧장 다른 책을 찾았다. 빛의 과거. 단편 소설과 다른 장편 소설의 흐름은 치즈처럼 늘어졌고, 가닥가닥의 사이마다 감칠맛이 넘쳐흘렀다. 그때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짜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물건 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 만 2년 간 남독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책이어도 꾸역꾸역 읽을 수밖에 없는 훈련소를 빠져나온 뒤부터, 책을 읽는 데에 더욱 속도가 붙었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모두 보상받겠다는 마음으로, 닥치는 대로 읽어치웠다.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좋았다. 작가의 의도가, 작품의 의의가 느껴지지 않아도 좋았다. 문장이, 표현이, 하다못해 단어를 건너뛰어도 개의치 않았다. 읽는 게 남는 거야, 읽는 게 남는 거라고. 그래도.


‘……뒤지겄다.’


그렇게 약 1달의 시간을 남겨둔 지금, 나는 구청 사무실의 사회복무요원 책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지막 권을 내려놓는다. 100페이지 남아 꽂힌 책갈피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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