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리얼중독자 May 04. 2024

그의 공간

허송세월

나는 너를 기다린다. 비밀번호 키가 달린 문을 민다. 나는 그와 인사한다. 손을 흔든다. 그가 깔아 둔 카펫을 밟는다. 그가 꽂아둔 꽃을 본다. 그의 공간은 주황색이다. 나는 그가 구해온 넓은 책상에 내 자리를 잡는다. 그는 나에게 미지근한 음료를 내준다.


나는 너를 본다.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는 너와 인사한다. 너도 카펫을 밟고, 책상에 너의 자리를 잡고, 음료를 대접받는다. 때로 나와 그와 네가 간식을 가져온다. 그의 공간에 오는 길에 롤케이크, 수제 쿠키, 쌀과자, 같은 것들을 사 온다. 간식을 먹으며, 음료를 마시며, 근황을 나눈다.


그가 시작한다. 나와 너는 태블릿 혹은 종이로 글을 받는다. 시를, 소설을, 에세이를 읽는다. 그가 묻는다. 어때요? 어떤가요? 어떻습니까? 나와 너는 잠깐, 멈추었다가 말한다. 좋네요. 좋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공간의 안쪽은 주황색이고, 공간의 바깥은 남색이다.


나는 너를 봤다. 너도 나를 봤을까? 블루투스 키보드의 자판을 납작하게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혹은, 네가 그가 잘 깎아놓은 연필을 쓰는 소리가 들린다. 먼지냄새, 나무냄새, 흙냄새가 난다. 그가 심어놓은 화분이 곳곳에 놓여있다. 빵냄새, 쿠키냄새, 과자냄새가 난다. 병을 열자, 술냄새도 난다.


나와 너는 대화한다. 카카오톡에 일제히 글과 사진이 올라온다. 나는 글을 혹은 사진을 보고, 너는 글을 혹은 사진을 소리 내어 읽는다. 그가 묻는다. 어때요? 어떤가요? 어떻습니까? 나와 너는 너 나 할 것 없이 말한다. 좋네요. 좋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잔에 술이 담기는 소리, 종이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 신발로 카펫을 끄는 소리. 공간의 안쪽은 소란스럽고, 공간의 바깥은 적막하다.


나는 너를 떠난다. 그가 말한다. 안녕히, 조심히, 잘, 가세요. 나는 너를 보내고, 너도 나를 보낸다. 간식 부스러기, 거의 다 마신 컵, 적게 남은 배터리, 나누지 못한 단어. 그의 공간에 무언가를 남겨놓고 떠난다. 그의 공간에 다시 찾아오기, 방문하기, 주워가기 위해서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 설탕 없이는 못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