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태경 Sep 03. 2024

2개의 시계, 2개의 디테일

스코브안데르센 1926 Automatic(좌, 이하 A)와 시티즌 프로마스터 nb6021-17e(우, 이하 B)


2개의 시계, 2개의 디테일




긴 여행을 준비하면서 시계 2개를 가져가려는데, 마침 내 눈에 A 시계와 B 시계가 띄었다. 둘은 생김새도 비슷하고, 용도도 비슷하고, 가격대 마저 비슷하다. 그래서 결국 두 시계 모두를 챙기게 되었다. B 시계를 주로 사용하고, A 시계는 만약을 위해 가져간다. 오늘은 두 시계의 두 디테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대동소이(大同小異): 크게 보면 같고 작게 봐야만 차이가 있다

도긴개긴(한 칸 차이 두 칸 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양새의 차이가 별로 없다

도토리키재기: 특별히 낫거나 모자란 게 없으나 서로 비교하는 것을 일컫는다


대동소이, 도긴개긴, 도토리키재기는 내가 좋아하는 말들이다. 이런 말들은 때로 패배주의적인 감상에 빠지게도 만들지만(“이걸 하나 마나 어차피 차이는 없어.”), 때로는 작은 것에 빠지는 집착을 줄여주고 여유를 준다(“지금은 작은 일에 집착하기보다는 큰 일에 집중해야 해.”).


시계라는 물건은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게 된다. 시계라는 물건 자체가 아주 미세한 세공 기술을 요구하는 금속 가공품이라는 점, 동시에 때로는 아주 비싼 물건이기도 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소위 말해 한 시계의 가격이 올라갈수록, 그에 비례해 더욱 미세한 영역에서 디테일은 좋아진다. 저가의 시계에서는 성능이 좋아지고, 고가의 시계에서는 장인의 작업이 더해진다.


보기에 좋은 게 먹기에도 좋고, 같은 가격일 땐 기왕이면 더 좋은 게 좋은 법이다. 보기에 좋은 것, 더 좋은 것이란 결국 시계에 얼마나 많은 제작 디테일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앞서 언급한 두 시계는 비교군으로써 훌륭하다.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큰 고려 요소 중 하나인 가격을 먼저 따져보자. A 시계와 B 시계는 서로 비슷한 가격대에 포진해 있기 때문에 소비자는 A 시계와 B 시계 둘 중 하나는 무조건 구입할 수 있다. 나는 두 시계를 모두 중고로 구입했고, 그때의 가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의 성능에서는 많은 차이가 나는데, 아래와 같다.


A 시계: 중소기업, 자체 제작 디자인, 역사적 헤리티지 없음, 저가 무브먼트, 낮은 성능, 평범한 소재, 국내 AS 센터 없음.
B 시계: 대기업, 자체 제작 디자인, 역사적 헤리티지 있음, 고가 무브먼트, 국제 인증 성능, 평범하지 않은 티타늄 소재, 국내 AS 센터 있음.


그렇다. A 시계는 B 시계에 비해 디테일에서의 장점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실제로 나도 A 시계보다는 B 시계를 더욱 애용하고 있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는 다양할 것이다. A 브랜드와 B 브랜드 사이의 규모의 차이, 운용할 수 있는 자금력의 차이,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와 노하우 여부의 차이. 그렇기 때문에 A 시계보다는 B 시계가 더 좋은 디테일을 갖게 된 것일 테고, 나아가 A 브랜드와 B 브랜드의 매출 차이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다.


문제는 A 시계와 B 시계 모두를 챙기는 입장에서, 내 눈에는 둘에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A 시계의 압도적으로 낮은 성능에 있어서, B 시계의 압도적으로 높은 성능에 있어서, 내 여행에는 어떤 시계를 사용하든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둘 다 튼튼하고, 시간도 잘 보여주고, 예쁘니까.


앞서 한 시계의 디테일은 가격에 따라 올라간다고 설명했지만, 분명 여러 가지 시계를 두고 비교해 본다면, 같은 가격대라고 해서 꼭 같은 성능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결국 시계 사이에 디테일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더라도, 소비자에게 그 차이가 얼마나 유효한지는 또 다른 이야기다.




결국 그래서 시계를 줄이게 되나 보다.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덜해질수록, 내가 갖고 싶은 시계는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시계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또 새로운 것을 구입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가진 것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말이다. 분명 나는 1개의 비싼 시계보다는 10개의 고만고만한 시계가 잘 맞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100개의 시계, 1000개의 시계가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내게 중요한 디테일의 차이는 10개의 시계 안에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