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뇌를 땀으로 적신다-2

by 이세계에이방인


언제나 출발선 뒤에 서면 묘한 떨림이 있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같이 공유된다. 정확히 어떤 떨림인지는 알수 없지만 그 떨림이 싫지는 않다. 2024년 봄 발바닥 부상이후 꽤 오랫동안 달리지 못 했고, 그리고 달리지 않았다. 스스로가 나태해짐을 느꼈다. 그냥 핑계를 찾았던거 갔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그리고 부상. 막연히 흘러가버린 시간. 깊어져가는 심연. 괜히 짜증이 올라왔었다. 능률은 오르지 않고 하는일 마다 다 안되는거 같고 노력의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 무언가 움직일 동력이 필요했다. 즉각적으로 느낄수 있게 고통이 필요했다. 이제 고통을 받을 차례가 왔다.


3! 2! 1! 출발!

컨디션은 모르겠다. 사람들이 많다. 휩쓸려 달려가고 있다. 아침 일찍 날씨는 좋다 못해 쨍쨍하다. 할수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앞으로 가겠다는 마음뿐 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아직 준비가 덜 됐구나' 라고 출발선이 지나서야 깨닫늗다. 가파른 오르막도 아닌데 유난히 힘이든다. 순식간에 날씨가 더워진다. 아니 금방 뜨거워진다. 쉽지 않을거 같다.


전략은 하나. 멈추지 않고 앞으로 가기. 빨리 달릴 필요 없다. 걷고 뛰고를 반복하며 멈추지 않는다. 리듬을 유지하는 것,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30분만에 그 생각이 틀렸단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고통스럽다. 나즈막한 오르막도 내리막도 평지도 도무지 힘이 안난다. 달릴 기운이 없다. 가다보면 나아질거란 기대를 했지만 도무지 컨디션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 두번째 CP에 도착했을때 깨달았다. '포기하고 싶다'. 이 생각이 머리 속을 지배했다. 순간 굉장한 더위를 느끼며 현기증이 났다.

태양은 너무 뜨겁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도 이런 기분 이었을까.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포기하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 걸을 기운도 안난다. DNF를 처음으로 떠올렸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처음있는 일이다. 단순히 하기 싫음이 아니다. 할수 없음도 아니다. 하기싫음과 할수없음이 동시에 밀려온다. 하고싶지 않다. 그늘 하나 없는 태양 아래 길고 긴 임도길을 지나가며, 도무지 달릴수 없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다음 세번째 CP 까지 대략 12km 정도 남았다. 평소라면 1시간 정도면 도착 할 거리. '포기','낙오' 를 떠올리며 시간에 밀려 나아간다. 세번째 CP.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다음 네번쨰 CP 드랍백에서 DNF 하자. 마음 먹고나니 더 서두르고 싶다. 이 고통에서 빨리 해방 되고 싶다. 아무리 수분을 섭취해도 갈증은 심해지고 아무리 에너지 젤을 보급해도 끝없이 기운은 떨어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인거 같다.


네번째 CP. 드랍백이 있는 곳. 그늘없이 태양빛은 너무도 강렬하다. 다행히 총은 없다. 회수차가 보인다. 일단 드랍백을 받았다. 일단 자리에 앉아 시원한 콜라 한잔을 마셨다. “DNF 하실분들 빨리 차에 타세요! 곧 출발 합니다!”. 머리로는 티야한다고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진정하고 드랍백을 열었다. 준비해둔 샤워타올과 갈아입을 옷들. 그리고 여분의 식량. 화장실로가 물로 얼굴부터 씻어냈다. 땀과 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 한참을 씻어낸 후에야 땀이 다 씻겨내려간거 같다. 그리고 샤워 타올로 온몸을 깨끗히 씻었다. 그리고 새옷으로 갈아 입었다. 뭔가 새로 리셋된 기분이다.

신기하게도 갑자기 정신이 번쩍든 느낌이다. DNF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날라갔다. 다시 기운이 채워진거 같다. 누군가 리셋버튼을 누르고 갔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안된다. 몸이 가볍다. 다시 달릴수 있다. 순식간에 고통에서 해방 됐다. 이것을 느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끝에는 해방이 있다. 다시 한번 그것을 깨닫는다. 뭔가 어려운일에 가로막힐때 마다, 하는일이 마음 처럼되지 않아 긴긴 심연에 빠져들때마다 언제나 이 고통의 감각들이 나를 깨워줬나 보다. 다시 나아갈수 있다는 느낌. 이 느낌을 되찾기 위해 달리고 있다.


그토록 뜨겁게 느껴졌던 태양도 한결 따뜻해 졌다. 몸이 가볍다. 다리의 감각이 온몸의 세포들이 다시 살아난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거 아니다. 여전히 오르막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갈증도 계속 느끼고 배고픔도 끊임없이 느껴진다. 그래도 할수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냥 머리로 느끼는게 아니라 몸이 느껴진다. 육체에서 느껴진다.

보지 못했던 푸른 하늘. 그 아래 산과 길. 본다고 해서 볼수 있는게 아니다. 공간이 없으면 경직된다. 경직되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 놓이다 보면 명확한 인과관계로만 구분 지을려고 한다. 세상은 인과관계로 정확히 구분 할수 없는 곳이다. 경계가 불분명 하다. 경직된 상태가 지속되면 고정관념에 갇히게 된다. 공간이 없다면 틈을 만들어야 한다. 그 틈으로 다시 빛이 들어온다.


러너스 하이. 내 몸 전체가 고통을 억제하기 위한 전략적인 시도 일지도 모르겠다. 산 속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그리고 순식간에 빛은 사라진다. 밤에 혼자 산길을 달리는건 무서운 경험이다. 산 짐승들 소리. 바람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게 된다. 헤드렌턴을 끄면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같은 세상이다. 보통은 아무리 길어도 꼭 앞선수, 뒷선수와 마주치기 마련인데 도무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불빛도 안 보인다. 비 까지 내린다. 이 길이 맞는지 아닌지 구분도 안될때 공포감. 마치 도깨비 불같이 보이는 레이스 반사띠(코스 마킹 테이프). 도깨비 불만 따라간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밤. 혼자 산길을 걸어 갈때 가장 무서운것은 졸음이다. 미친듯이 졸음이 쏟아진다. 각성의 효과는 이제 끝이 났나보다. 더한 고통이 몰아치는 중이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게 좋을까. 나는 그냥 앞으로 가기를 선택한다. 왠지 눈을 감으면 못 뜰거 같다. 졸면서 걷다 정신차리고 도 졸다 정신 차리고를 반복. 도무지 다음 CP가 나올 생각을 안한다. 비 바람이 불어 추위 때문에 멈출수도 없다. 그리고 졸음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는 사이 CP에 도착했다. 따뜻한 차한잔과 라면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 이후에는 그냥 졸음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고통 뿐이었다. 끝날거 같지 않은 졸음의 고통. 방법은 없다. 자던지 그냥 견디든지. 나는 견디는 쪽을 선택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상전이. 액체가 기체로 변화는 순간,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순간을 본적이 있을까? 중간 단계는 없다. 갑자기 상태가 바뀐다. 변화의 순간은 언제나 그렇게 갑작스럽게 온다. 아주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물론 잠결에 비몽사몽으로 기어올라갔는지 걸어올라갔는지 모르겠다. 아주아주 힘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 끝에서 내리막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점점 정신이 또렷해진다. 졸음에서 해방됐다.


두번째 각성. 어렴풋이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다. 졸음은 날라가고 정신은 또렷해진다. 오르막 내리막도 힘들지 않다. 그냥 다리가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멈춰 지지도 멈출 생각도 없다. 피니시까지 달리는거 밖에남지 않았다. 새벽 안개를 헤치고 숲길을 달리며 장수 스타디움이 멀리서 보인다. 한발 한발 마다 피로가 씻겨가는 기분이다. 시원한 새벽공기 냄새, 따끈따끈한 아침 햇볕도 기분이 좋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 공기의 냄새, 촉감, 기분을 느끼기 위해 밤새 달려왔다. 이건 우리만의 특권이다.


피니시를 통과한 순간. 끝냈다는 안도감, 에너지를 쏟아부은 공허함. 울트라 러너라면 공감 할거다. 그리고 다시 에너지가 채워진거 같다. 긴 나태함에 빠져 바짝 말라버린 뇌가 다시 땀에 흠뻑젖어 말랑말랑 해졌다. 또다시 말라 비틀어질 때가 오겠지만 언제든 고통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 다른 방법도 찾을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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