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to 100 프로젝트] 그토록 잔인했던 44시간

장수 트레일 레이스 100마일

by 이세계에이방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거리와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코스로, 장수의 웅장한 자연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팔공산, 백운산, 장안산, 남덕유산 서봉 등 대표 봉우리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장대한 루트로,숲길·임도·능선·계곡을 오가며 변화무쌍한 지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극한의 난이도를 가진 코스로, 울트라 트레일러너에게 추천합니다.
-장수트레일레이스


왠지 이 문구를 보고 설레인다면 언젠가 무조건 100마일을 달리고 있을거다.



10/26금요일 새벽. 전날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왜인지 모르겠다. 첫차를 타고 남원에 가야한다. 늘 그렇듯 새벽에 눈을 뜨고 오늘은 달리기 대신 샤워와 면도를 한다. 첫차를 타고 남원에서 장수를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그렇게 몇시간을 버스를 타고 장수에 도착했다.


장수 트레일 레이스는 이제 장수의 축제가 됐다. 일주일전 비 예보와 다르게 상당히 뜨거운 날씨다. 비오는거 보다는 좋다. 장비 체크를 통과하고 선수등록 후 레이스팩을 수령했다. 번호표를 달고 나니 점점 실감이 난다.


조금있으면 곧 출발한다. 금요일 15:00분이 출발 시간이다. 아마 일요일에 들어올거라 예상된다. 점심을 먹고 적당히 사진을 찍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역시나 스타트 라인에 서면 비로서 깨닫는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구나. 두렵다.

100마일이란 숫자가 주는 압박이 엄청나다. 100마일이란 숫자를 생각하지 말자. 지금 해야할것만 생각하자. 다음 CP까지 살아남기.


START → M1 | 장수종합경기장 → 와룡자연휴양림(0km → 10.8km)

10/26 금 15:00 출발 - 16:22 도착 (1:22:02)


생각 이상으로 뜨거운 날씨. 비가 올거란 예보에서 순식간에 뜨거운 날씨로 변했다. 비오는거 보단 좋긴 하지만 출발 부터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지 않다. 꾸준한 오르막 임도길과 타이트한 컷오프 타임 덕분에 조금의 여유도 없이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다들 속도를 붙혀서 앞으로 달려가는데 나만 점점 쳐진다. 옆구리가 아프다. 먹은것도 없는데 왜이럴까. 온몸에 기운이 안난다. 시작하자 마자 컷오프 타임에 걸릴수도 있을거 같다. 지금 뭔가 단단히 잘 못된거 같다. 불안하다. 아무리 쉬지 않고 달리고 걸어도 첫번째 CP가 나오지 않는다. 작년 100K때와 위치가 바뀐거 같다. 시간은 벌써 점점 줄어가는데 여전히 나는 첫번째 CP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힘들다. 출발부터 이렇게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컷오프 18분을 남기고 첫CP에 도착 했다. 이정도로 시간에 쫓긴적이 없었다. 사진찍고 영상남길 여유가 없다. 허겁지겁 입속으로 음식들 쑤셔 넣는다. 양쪽의 물통을 가득 채우고 빠르게 CP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M1 → M2 | 와룡자연휴양림 → 뜬봉샘방문자센터(10.8km → 26.1km)

*21.1km 지점에 워터포인트가 추가

10/26 금요일 (WP 18:46 도착) -19:51 도착


본격적인 산으로 들어서는 구간이다. 두개의 피크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앞에 어떤 산이 있고 몇미터이고 얼마나 가파른지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당장 다음 컷오프 타임이 임박하다. 100 마일은 굉장히 긴 거리다.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한다. 엘리트 선수급이 아닌 이상 밤을 두번을 보내게 되어있다. 잠은 절대 참기가 힘들다. 나도 밤을 두번 보내본적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가 예측이 안된다. 가능하면 잠을 자두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충분히 시간을 벌어둬야 한다. 자연을, 대회를 즐길 틈없이 시간을 쫓아간다. 천상데미봉과 팔공산 두개의 피크는 초반이라 그런지 별 어려움없이 넘어간다. 그래도 업다운이 반복되다 보니 벌써부터 피로함이 밀려온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와 바짝 긴장된 상태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다 보니 땀이 흥건하다 못해 뚝뚝 떨어진다. 벌써 몸이 망신창이가 된 기분이다. 무릎의 테이핑도 담에 절어 떨어진다. 무릎이 괜찮긴 하지만 심리적으로 긴거리를 버텨낼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팔공산을 넘어 자고개 워터포인트까지 슬슬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미 어두워졌지만 도중에 멈춰서 배낭에서 헤드랜턴을 꺼낼 시간이 아까웠다. 1분이라도 더 시간을 벌고 싶었다. 자고개 워터포인트에 도착 했을때는 이미 많은 선수들이 도착해 있었고 포기하는 선수들도 보였다. 지금부터가 첫번째 고비다. 해는 떨어졌고 헤드렌턴의 불빛이 없이는 보이지도 않는다. 헤드레턴만 꺼낸 후 바로 출발했다. CP당 1분씩만 이라도 시간을 벌자.

어두워진 임도길을 달리며 길이 썩 좋지 못함을 느꼈다. 지금부터 다음 CP가지는 고도상 내리막이라 이런 구간은 최대한 빨리 달려 시간을 벌어야 좋다. 내 발앞 헤드렌턴의 불붗만 보여 정신없이 달려갔다.

다음 CP까지 시간안에 못 들어가면 어떡하지? 그 다음 CP는. 포기하고 DNF 할까? 컷오프 당할지 언정 포기는 하지 말자. 스스로 포기보다 차라리 컷오프를 선택하자. 순간. 지면이 눈 앞으로 확 덮쳐왔다.

딴생각에 방심하다 배수로에 발이 빠져 버렸다. 달리는 도중 무방비로 당했다. 왼쪽 무릎의 테이핑은 날라가고 피가 흐르고 있다. 조금도 지체할 여유가 없다. 다행히 배낭은 터지지 않았고 스틱도 무사했다. 지금은 통증은 무시해야 한다.

컷오프 40분 정도를 남기고 도착. 다음 CP 까지의 거리가 꽤 있는 편이다. 간단히 상처만 소독하고 음식을 먹어줘야한다. 먹은 만큼 움직일수 있다. 긴 거리를 대비해 500ml물통 하나를 더 챙겨왔다. 총 1.5l 물을 보급하고 서둘러 출발 한다.



M2 → M3 | 뜬봉샘방문자센터 → 동화분교(26.1km → 44.8km)

10/26 금요일 23:43 도착


지금부터 구간은 18km 이상의 긴 거리다. 덥고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달려오며 피로해지고 있는 시간대다. 긴 거리만큼 가파른 오르막이 두개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계곡을 좋아하지 않는다. 계곡의 그 특유의 돌밭길과 불안정한 지면과 물이 나는 정말 싫다. 어두워 시야도 좁은데 계곡을 올라야 한다. 피로하다. 한여름이 지났는데도 땀이 끈적하게 피부를 비집고 나온다. 피로와 섞여 온몸에 달라 붙는 기분이다. 온몸의 습한 기운탓에 고글마저 뿌옇게 흐려져 시야를 계속 막는다. 지지 않겠다. 시간에 패배 하더라도 스스로에겐 지진 않겠다. 꾸역꾸역 계곡을 지나 오르는길. 전날 비가 와서인지 계곡물이 돌다리를 범람하고 있다. 가장 꺼려했던 입수. 물을 피할길이 없다. 물에 빠진 두 다리가 무겁다. 아직 갈길이 먼데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거 같다.

발 앞만 보며 오르는데 눈앞에 진흙벽이 있다.

"앞에 사족보행길 있습니다." 답사를 한 선수인지 앞을 지나쳐가며 무심히 얘기 해준말. 전날 온 비로 사족보행길이 아니라 진흙벽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 앞에 도착했을때 이미 여러명의 선수들이 그 벽을 오르고 있었다. 깜깜한 밤. 헤드렌턴 불빛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들 올라가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려온다. 앞쪽에서 오르지 못하니 뒤쪽에서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한번 미끄러진 곳은 더 미끄러워진다. 진퇴양난. 여길 넘어서야 앞으로 갈수있다. 작은 나무 뿌리, 풀 마저도 잡고 올라가야 한다. 앞선 선수가 미끄러져 내 옆으로 떨어진다. 간신히 붙잡았다. 혼자서는 어렵다. 도와야 한다. 정말 사족보행으로 힘겹게 기어올라 뒷사람들을 끌어올리며 나아갔다. 그 짧은 1km의 벽을 넘는데 1시간이 소비 됐다. 전날 비가 왔었긴 하지만 비가 온다면 이 구간에서 대거 탈락 할만한 코스 였다. 여성 주자들은 정말 오르기 쉽지 않을거 같다. 남성 주자들도 충분한 힘이 없다면 오르는게 만만치 않다. 어찌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아마 체력소비가 엄청날거다. 스트렝스 훈련이 필히 필요할거다. 능선을 지나 임도길 내리만을 달리다 보니 세번째 CP에 도착했다

작년 100K(2024년) 드랍백 구간이다. 작년에도 굉장히 힘들었다. 경험해본적 없던 레이스 중 피로감에 DNF 할 생각이었는데 드랍백 구간인 동화분교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되며 나머지 구간을 끝까지 달렸던 기억이 있던 곳이다. 작년같은 반전을 기대 했지만, 이번은 달랐다. 컷오프 57분을 남겨놓고 도착 한지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일단 의자에 앉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일단 수분 섭취후 간단히 식사를 했다. 뭐든지 먹어야 움직일수 있다. 에너지젤이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고체식량이 필요하다. 입맛은 없지만 억지로라도 밥을 쑤셔 넣는다.



M3 → M4 | 동화분교 → 봉화산정자(44.8km → 54.5km)

10/27 토요일 01:38 도착


시간이 촉박하여 쉴 시간이 없다. 물을 보급하고 서둘러 다음 CP로 움직인다.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지만 일단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조금도 포기할려는 마음이 들지 않게 빨리 움직였다. 다음 CP는 작년 100k와 같은 봉화산정자. 대략 10km정도의 긴 오르막 임도길 이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도 분다. 방수자켓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다 다시 배낭에 집어 넣었다. 비도 오락가락 하고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그동안 느꼈던 열기가 한순간에 날라갔다. 깜깜한 어둠속에서 헤드렌턴 불빛만 보며 꼬불꼬불한 오르막을 올랐다. 긴 오르막인것 말곤 그다지 어려움없이 봉화산정자에 도착.

이미 금요일을 지나 토요일로 넘어간 시간 새벽 01:30분이 넘었다. 첫번째 밤을 보내야될 구간이다. 1/4정도의 거리를 지나왔고 누적고도도 제법 쌓여 슬슬 피로가 눈뜰 시간이다. 거기다 잠 까지 올 시간이다. CP에는 이미 잠을 청하고 있는 선수들이 몇 있었다. 이 다음 구간이 어떤 구간인지 알고 있기에 나는 쉴 여유가 없었다. 다음이 드랍백 구간이긴 하지만 거리가 16km정도나 되고 백운산을 넘어야 한다. 가장 피로하고 잠이 올 시간대에 지나가야 하기에 부지런히 움직이는게 나을듯 했다. 최대한 빨리 이 구간을 넘어서 드랍백에서 휴식을 하는게 나을거란 판단이 들었다.



M4 → M5 | 봉화산정자 → 무룡고개(54.5km → 70.4km)

10/27 토요일 06:33 도착


지금부터는 백두대간을 지나는 구간이다. 작년 100k에서 가장 힘든 구간 이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시간대에 지나게 됐다. 가도가도 끝나지 않는 산길. 깜깜한 어둠에 공간지각력이 상실된거 같다. 헤드렌턴의 불빛밖에 보이지 않으니 어둠에 갇혀있는거 같다. 거기다 잠이 올 시간. 다행히 피로감은 있지만 아직까지 졸음이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피로감 때문인지 집중력이 떨어진다. 시야도 좁아지고 거기다 깜감한 어둠. 멍하다. 해야될일은 계속해서 앞으로 가는것 뿐이다. 05:30분쯤 백운산에 도착. 1년만에 다시 만난 백운산. 1년이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 아직 레이스의 절반도 오지 못했는데 완주를 장담할수도 없는 상황이다. 100마일을 위해 쏟았던 지난 1년이 헛되이 되고 싶진 않았다. 매순간 1초만 이라도 줄이자. 그렇게 10초를 줄이고 1분을 줄여 나가자.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다. 역시 포기보단 최선을 다한 컷오프를 선택하는게 지금 선택할수 있는 최선책인거 같다. 1초를 줄이기 위한 사투를 하며 드디어 다음 CP인 무룡고개에 도착. 컷오프가 1시간 정도 남은 상황이다. 역시 쉴 여유가 없다. 해야할일을 빠르게 선택해서 움직였다.

먼저 드랍백을 찾고 국그릇을 꺼내 (이번 레이스에서는 전국간 일회용품 사용이 금지. 모든 식기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밥을 흡입했다. 드랍백 구간에 밥과 국이 제공 되기에 전략적으로 드랍백에 여유있게 밥을 떠먹을수 있게 국그릇을 넣어뒀다. 그렇게 밥을 흡입하며 핸드폰을 충전. 그리고 넣어두었던 샤워타올로 온몸을 깨끗히 닦아내고 옷과 양말 신발을 갈아 신었다. 다음 남은 구간을 대비해 에너지젤도 충분히 보충하고 물도 충분히 보충했다. 마지막으로 드랍백에 넣어두었던 칫솔로 양치질을 하며 지금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끝냈다. 이 모든걸 다하는데 20분 정도가 소비됐다. 여전히 시간적 여유는 없다. 휴식 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출발한다.



M5 → M6 | 무룡고개 → 육십령휴게소(70.4km → 82.7km)

10/27 토요일 09:54 도착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앞으로 견뎌 내야할 거리와 고도는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이다. 초반에 넘어진 충격의 영향인지 슬슬 왼쪽 무릎이 불편해지고 있다. 햄스트링과 내전근 마저 경련이 올듯 말듯한다. 넘어졌을때 충격이 꽤나 컷었나 보다. 상처에서 피와 진물이 정강이를 타고 흐른다. 왼무릎의 장경인대염이 다시 도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완벽히 나았다고 생각하지만 노파심에 늘 대회에서는 테이핑을 한다. 일종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다. 하지만 이미 더위와 땀에 거의 떨어져 나가버렸고 넘어지면서 무릎의 테이핑 마저 떨어져 나간 상태다. 괜찮을거라 믿고 싶지만 지금 왼쪽 무릎상태가 심상치 않다. 무릎 주변의 근육(햄스트링+내전근)들이 경련을 일으킬듯이 불편해지고 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해가 뜨고 시야가 밝아진 상태에서 시작되는 백두대간 코스. 업다운이 있지만 시야가 밝아져서 달리기에는 나쁘지 않다. 물론 달린다기 보다 걷는 시간이 많지만 컷오프의 압박 때문에 여유있게 걸을 시간이 없다. 달리고 걷고. 최선을 다해서 전진할뿐.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지만 그 틈에 들어오는 백두대간에서 바라보는 산맥들은 역시 트레일을 달리는 이유, 장수 100마일을 달려야 하는 이유다. 어렵지 않게는 아니지만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육십령휴게소 6번째 CP에 도착.



M6 → M7 | 육십령휴게소 → 토옥동계곡(82.7km → 98km)

10/27 토요일 14:45 도착


여전히 촉박한 컷오프 타임. 여유가 없다. 다음은 전체 코스중 가장 난코스 남덕유산 서봉을 넘어야 한다. 답사 하셨던 분들이 ‘엄청나다’며 겁을 줬었다. 어느정도 고통스러울지 가늠이 안된다. 누적거리는 80km가 넘었고 누적고도도 4,000m가 넘었다. 피로도가 상당한 거리와 시간대. 그리고 단번에 상승고도가 1,000m가 올라가는 난코스.

레이스 출발전 부터 두려움과 기대가 가장 컸던 코스. 어느정도의 고통이 따를까. 버텨낼수 있을까. 컷오프를 당하더라도 남덕유산 코스만큼은 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출발전 충분한 휴식과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데 도무지 여유가 없다. 그리고 생각보다 무릎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내린다. 감사하게도 의료진에서 친절히 치료를 해주신다. 상처보단 무릎의 상태가 불안하다. 어디까지 버텨낼지, 끝까지 견뎌낼지 아직은 알수없다. 그동안의 트레이닝이 과연 효과 있을지 없을지. 지금부터는 그동안의 트레이닝의 영향이 미칠수있을지에 대한 검증 단계다. 불지 않는 쌀국수 컵리면을 씹으며 예전 군대시절이 떠오른다. 그시절 아무도 먹지 않던 쌀국수를 하필 지금 이순간에 딱딱한 쌀국수 면을 씹으며 그때는 수동적인 괴로움을 받고 있었지만 지금은 능동적인 고통으로 뛰어가는 중이다. 무엇을 위해서든 원해서 이 순간으로 뛰어가는 중이다. 아주 꼭꼭 씹으며 하나도 남김없이 빠르게 흡입한다. 500ml 생수병을 챙겨 주신다. 물보급에 아주 적절한 운영진의 선택인거 같다. 총 2L의 물을 보급하니 어깨가 무겁다. 지금은 가벼운거 보다 충분한 물을 챙기는게 좋다.

해가 뜨고 나니 다시 뜨거워진다. 서둘러 길을 나선다. 지금부터는 남덕유산으로 오른다.


내가 할수있는 산을 오르는 최선의 전략은 쉬지 않고 꾸준히 오르는것 이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상세히 서술하겠지만 100마일의 준비 중 이부분을 가장 중점으로 트레이닝 했다.

급격히 스피드가 느려지는 구간이라 그런지 주로 중간중간에 다른 선수들을 만났다. 다들 지친기색에 말이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까마득히 보이는 남덕유산 서봉. 이 좋은곳에 와서 산을 느끼고 즐길새도 없이 멈추지 않고 앞으로 위로 가야만 하는것이 왠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진다. 앞서 있었던 팔공산, 백운산은 미안하지만 별거 아니었단 생각이 든다. 물론 다시 또 간다면 왜이리 힘드냐고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100마일의 에피타이저일 뿐이었다.

태양은 뜨겁고 땀은 쏟아지고 목은 마르다. 다친 무릎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어깨는 너무 무겁다. 다리는 너무 무겁고 힘들고 멈추고 싶다.

변태는 아니지만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이 고통의 순간이 기다려졌다. 거친 호흡과 근육의 통증과 반대로 몸이 멈추지 않는다. 한발씩 한발씩 멈출수가 없다. 느리지만 꾸준히 나아간다.

1,492m. 100마일 코스중 가장 높은 패스 남덕유산 서봉에 올랐다. 이미 몇분의 선수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여유를

부려도 될거같다. 눈으로만 기억 하기에는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이 아쉽다. 사진으로 남기며 덕유산의 기운을 깊이 새겼다. (누군가 이 코스를 온다면 각오를 단단히 하는게…)


“이제 끝이에요. 다운힐 30분 정도만 내려가면 끝났습니다.”

토옥동계곡까지 30분. 힘들게 올라왔으니 기쁘게 30분을 내려가면 된다. 30분. 30분. 끝나지 않을거 같은 내리막. 상당히 가파르고 길어 험하다. 거기다 돌맹이 너덜길. 잘못디디 다간 발목이 날라갈거 같다. 내려가는길은 정말 고통의 연속 이었다. 끝이 났다는 안도감과 30분이라는 불확실한 정보에 완전히 마음을 풀은 상태. 가장 약했던 돌맹이 너덜길. 거기다 다운힐. 최악에 최악이 더해졌다. 30분만 버티자는 생각에 터덜터덜 내려가는데 마법에 걸린거 처럼 끝없이 내려간다.

어느 외국인의 등산할때 한국인의 거짓말에서 ‘이제 지왔어요. 좀만 가면 끝이에요’ 가 있었다. 한국인도 똑같이 속는다는걸 몸소 증명하는 중이다.

한참을 내려가는데 40분이 소요되고 있었다. 앞에 운영 스텝이 보였다. 이제 다왔구나. 안도하는 찰라.

“이제 끝입니다. 조금만 내려가면 되요. 화이팅!”

다왔다. 빨리 이 다운힐을 끝내고 싶다. 끝내고 싶다. 끝내고 싶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다운힐. 도착하지 않는 CP. 몰카인가? 한국인의 거짓말에 속아 놓고 또 속고 말았다. 급격히 날아가버린 멘탈.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는다. 컷오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다운힐 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간다. 저주다. 이것은 저주다. 교만한 인간에게 내려지는 저주다. 잠시 내가 교만했다. 덕유산을 만만히 봤던 나의 교만을 다운힐에서 완전히 박살을 내주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짜증과 통증이 파도 처럼 밀려온다.

‘그냥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

30분이라던 시간이 결국 100분이나 걸렸다.



M7 → M8 | 토옥동계곡 → 집재졸음쉼터(98km →109km)

10/27 토요일 17:10 도착


컷오프 90분전. 여유를 내기에는 어중간한 시간. 남은 거리와 시간을 생각한다면 서두르는게 좋다. 두번째 밤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최대한

많이 가놔야 한다. 일단 앉았다. 아직 살아남았다. 다시 움직일 의지가 생겼다. 간단히 음식을 섭취하고 물을

보급하고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하기로 한다.

지금부터는 달리기 좋은 임도길과 도로가 이어진다. 달려야 하는데 도무지 달려지지 않는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내 두발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고 싶다. 산속을 달릴때와는 다르다. 공간이

넓어지니 외로움이 강하게 밀려와 온몸에 달라붙는다. 넓고 긴 한적한 도로. 그 길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있는거 같다. 나는 여전히 나약하다. 육체만큼이나 정신도 나약하다. 가장 거친 코스를 지나왔는데 더이상

가기가 싫어진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아쉬워 포기하지는 못하겠다. 차라리 컷오프에 걸려서 탈락 되고 편히 쉬고 싶다. 온몸이 불편하다. 여전히 포기 할 용기도 없이 나약하다.

터덜터덜 외로운 길을 의지 잃은채 달려가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 도로를 달리는데 속도는 나지 않고 의지를 잃고나니 기운도 없고 자주 걷게 된다. 주로 중간중간에 길을 안내 해주시는 스텝분들이 많다. 교통통제도 해주시고 친절하고 안전하게 주로 안내 해주신다. 이런분들이 있으니 안전하게 달릴수있다. 완주는, 아니 레이스는 혼자가 아니다. 스텝분들이 없으면 선수도 없다. 괜시리 동질감을 느껴진다. 더이상 혼자가 아닌거 같다. 반갑게 응원해주시는 스텝분들에게 나 역시도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말없이 웃으며 건내주시는 ‘메로나’아이스크림.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는 사람들만의 공진이 느껴진다.


Get it done

끝내고 싶다. 내 두발로 끝을 내고 싶어졌다. 끝을 내야만한다.

하지만 의지와는 반대로 여전히 몸 컨디션은 돌아오지 않는다. 꾸역꾸역 걷고 달리며 겨우 8번째 CP에 도착했다.



� M8 → M9 | 집재졸음쉼터 → 장계천변(109km → 118.9km)
본격적인 두 번째 어둠이 찾아오는 포인트이므로, 야간 장비 점검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 구간도 고도 차이가 크지 않아 상대적으로 편한 구간입니다.

19:29 도착


간단히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고 땀을 씻어냈다. 그것만으로도 개운한 기분. 물만 보충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두번째 밤이 시작될 구간이다. 미리 헤드렌턴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지나온 구간과는 반대로 상대적으로 편안한 구간이다. 약간의 업다운은 있지만 평평한 임도길이다. 몸은 지칠대로 지쳤다.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계속 멈추기를 원한다. 더이상 달릴수가 없다. 굴곡진 임도길을 최선을 다해서 걷고 있지만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거 같다. 마음은 피니시를 향하고 있지만 몸은 계속 제자리다. 순간 울컥 짜증이 올라온다. 부족한 실력에 대한 화가 왈깍 쏟아져 나왔다. 욕이라도 지르고 싶다. 돌아보니 나와 같아 보이는 선수가 보였다. 애써 그분에게 얘기했다.

“같이 화이팅해서 완주까지 해내시죠!“

인간관계에 소극적인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포기할거 같은 마음에서 살려달라는 애원이었는지 나처럼 도와달라는 마음을 느꼈는지 아니면 둘다 였는지 알수는 없다. 그걸 계기로 동반주가 시작 됐다.

나보다 한살 많은 형님. 형님도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지나왔던 코스 얘기들을 하며 경험과 감정을 교류하며 걸었다. 나만 힘든게 아니었다. 다들 힘든 순간들을 지나왔고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선수들간의 경쟁이 아니다. 모든 선수와 함께 100마일 코스와의 대결이다. 그래서 주로에서 만나는 선수들끼리 응원 할수밖에 없다.


‘같이 100마일을 완주 합시다.’


입을 다문채 하루가 넘게 말없이 달려왔던 시간들에 내 목소리 마저 잊어버릴때쯤 대화상대가 생겨 가는길

내내 지루함이 없었다. 형님도 달릴수 없었는지 혹은 나때문에 달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함께 걸으며 대회정보들과 러닝 정보를 나누며 9번째 CP에 도착했다.



M9 → M10 | 장계천변 → 산림레포츠센터(118.9km → 132.3km)

10/27 토요일 23:43 도착


갑자기 여유있는 컷오프 시간. 드디어 컷오프 저승사자가 사라졌다. 더이상 쫓기지 않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두번째 밤을 맞이 했다. 이번엔 CP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충분히 먹고 마셨다.

지금부터가 진짜 100마일로가는 중요한 지점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들어간다. 누적거리기 100km가 넘어가고 두번째 밤을 맞이했다. 누적거리는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 넘어져서 다친 무릎은 계속 신호는 있지만 멈출만큼의 통증은 아직 없다. 다만 졸음이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다. 첫번째 밤은 워낙 시간에 대한 압박 때문인지 체력이 나아져서 인지 모르겠지만 피로함 말곤 크게 졸음없이 잘 견뎌냈다. 그 부분은 나로써도 신기하다. 언제나 밤을 새는것에 큰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두번째 밤이 두렵다. 견뎌낼수 있을지.


길게 뻗은 길을 지나 다리를 지나고 나면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던 침령산성 일대를 달리는 구간이라고 하는데 깜깜한 밤이라 뭐가 뭔지 구분이 잘 안된다. 거기다 음산한 붉은, 아니 빨간 조명. 귀신이라도 부를 기세다. 성벽인지 뭔지 모를 큰벽이 보인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밤이되서 그런지 내 눈이 침침한지 도무지 길을 못

찾겠다. 정말 동반주 했던 형님이 없었다면 길 잃고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필수장비에 네비게이션 기능이 있는 GPS시계가 있었다. 내 시계도 GPS가 되지만 문제는 베터리다. 코로스 페이서3. 길어도 20시간 정도 될지 모르겠다. 일단 레이스 코스gpx 파일을 시계에 저장 해뒀지만 베터리

문제로 네비게이션 기능을 사용 할수 없었다. 시간만

확인 하는 용도로 썼다. 카시오 전자 시계와 다를바가

없었다. 베터리가 오래가는 기종은 너무 비싸 아직

구입할수가 없었다. 대신 스마트폰에 구글/맵스미 에 gpx파일을 저장해서 레이스 코스를 저장 해뒀다.

가능하면 코스마킹을 보며 레이스를 진행 하고 싶었다. 작년 대회에는 코스마킹이 정말 기가 막히게 되어있어 GPS시계 없이도 충분히 가능했다. 지독한 길치인 나도 한번의 알바없이 피니시 하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너무 드문드문 코스마킹이 보여서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만 헤매고 있었던건 아니었다. 코스마킹이 잘 보이지 않으니 속도가 다들 늦어져서 6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6명의 머리를 합쳐서 길을 찾고 달린다. 같은 퀘스트를 받고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마치 게임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긴긴 길이 끝나고 드디어 10번째 CP에 도착했다




M10 → M11 | 산림레포츠센터 → 무룡고개(2차)(132.3km → 150.5km)

10/28 일요일 05:28 도착


이제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고 있다. 누적시간은 32시간이 훌쩍 넘었다. 지금부터가 고비가 될거다. 경험한적 없는 피로와 싸워야 한다. 시간적 여유는 있다. 충분히 먹고 마시고 휴식을 해준다. 10분 정도 눈을 붙혔다. 그리고 믹스커피를 한잔 마시고 출발.

지금부터 다음 CP 드랍백까지 18km 정도. 길다면 길고 달린다면 늦어도 3시간대면 도달할수 있다. 충분히 달린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장안산 임도길을 달린다. 은근한 오르막이다. 일요일로 넘어갔고 2일째 잠을 못자고있는 상태. 순식간에 상황은 나빠졌다.


그동안 쌓였던 졸음이 한순간에 밀려온다. 정신이 몽롱하다 못해 헛것이 보인다. 졸면서 걸어갈수밖에 없다. 길을 벗어났다 돌아오기를 반복. 동반주 하는 형님도 도저히 안되겠는지 5분만 자다 가자고 한다. 길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감자마자 알람이 울린다. 다시 일어나 앞으로 간다. 지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 졸면서 걸으니 꿈속을 걷고 있는거 같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조차 안된다. 잠을 자지 못하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했던가. 극심한 괴로움이 뇌를 덮친 기 기분이다. 따귀를 때려도 카페인을 먹어도 이 졸음이라는 녀석이 감당이 안된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 눈을 드고 있을때 분명 길이었는데 눈을 뜨면 나무가 앞에 서있다. 만약 낭떠러지 였으면? 오싹오싹 하다. 그래도 다행히 산에서 내려온 이후에 졸음이 몰려와서 불행중 다행이다.

길고긴 임도길의 오르막. 이 길을 달릴수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끝낼거 같은데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비틀비틀. 눈을 감은 채 걸으니 똑바로 걸어지지도 않는다.

이런 순간은 어쩔수 없다. 선택은 두가지. 잠을 자던가 아니면 계속 나아가던가. 나는 계속 나아가기를 선택 했다. 잠깐 자는걸로는 해결이 될거 같지 않은 쌍태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놨던 시간은 급격히 줄어가고 있다. 또다시 여유가 없어졌다. 컷오프 저승사자가 뒤쫓아온다. 어떻게든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졸음이 깨기를 갑작스럽게 몸이 정신이 각성 되기를 바라며 몸을 끌고 갔다.

드디어 끝없이 오르던 임도길의 끝. 장안산 능선을 향한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났다. 얼마나 지체를 했는지 순식간에 5명의 선수들이 모여 들었다. 가파른 오르막을 넘어 11번째 CP인 두번째 드랍백 구간으로 돌아왔다.



M11 → M12 | 무룡고개 → 지실가지마을(150.5km → 157.2km)

10/28 일요일 07:54 도착


또다시 시간이 촉박하다. 컷오프 타임이 60분밖에 남지 않았다. 앞선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제 완주도 장담 할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 드랍백을 찾아서 샤워타올로 몸부터 씻어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있고 잠시 앉아 사골국을 마셨다. 이제부터는 더이상의 에너지젤은 의미가 없는거 같다. 음식이 먹고 싶었다. 따끈한 사골국을 마시며 몸이 회복되기를 바랄뿐이다.

여기서부터 동반주 하던 형님의 친구분이 합류했다. 100K 코스에 참가했고 지금CP가 100M과 100K 선수가 만나는 지점이다. 혼자에서 두명. 두명에서 이제는 셋이 되었다. 셋이서 마지막까지 쥐어짜야만 하는 상황.

날이 밝아 오고 있고 CP 두개만 지나면 피니시다. 시간이 별로 없기에 서둘러 갔다.

마지막 남은 산. 장안산만 넘으면 더이상 큰 산은 없다. 이제 힘들어도 참고 뛰어야 된다. 장안산을 오르는 길이 숨은 찬데 피로하지가 않다. 빛이 생기고 시야가 넓어진다. 장안산의 억새가 새벽 공기에 일렁인다. 더이상 무릎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호흡은 거칠어 지고 있지만 몸의 리듬이 호흡과 맞춰진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하늘을 오르는 기분이다.

그럴때가 있다. 갑자기 통증이 사라지고 피로함이 날아가는 느낌. 머리 속이 가벼워지고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가 되는 기분. 내 모습이 보이듯 시야기 넓어지는 집중되는 느낌. 장거리를 달리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온다. '드래곤볼'에서 카카로트가 초사이언으로 각성하듯 각성되는 순간이 온다. 나에겐 '러너스 하이' 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말로는 설명 할수 없다. 나는 언제나 이 순간만을 기다린다. 이 순간을 위해서 달리는 지도 모르겠다.

정상에서의 다운힐. 젖은 땅과 돌들이 제법 미끄럽다. 이대로 달릴수있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장안산을 내려온 후 형님들을 기다리는데 직전에 만났던 여성 선수가 힘겹게 내려온다. 장안산 오르기전 발에 물집으로 진통제를 찾던 선수분이 었는데 다시 통증이 온거 같다. 진통제를 몇개더 챙겨드리고 다음CP로 달려갔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돌길 내리막. 지금은 각성 상태다. 두려울게 없다. 시계를 보니 여유가 없다. 하지만 ‘해낼수 있을거 같다’는 묘한 믿음이 샘솓는다.


할수있다. 해내고야 말테다



M12 → M13 | 지실가지마을 → 신덕산마을(157.2km → 165.2km)

10/28 일요일 09:51 도착


다시 컷오프의 압박. 컷오프 40분을 채 남기지 않고 12번째 CP에 도착했다. 더이상 시간을 보지 말자. 느낌대로 달리자. 물은 반만 채웠다. 최대한 가볍게 하는게 좋을거 같았다. 육개장 컵라면을 후딱 해치우고 형님들과 마지막을 향해서 출발한다.

작년 100K의 기억이 떠오르는 숲길. 업다운이 있지만 푹신한 숲길이 오히려 딱딱한 도로를 달릴때보다 편하다. 역시 땅의 기운들이 마지막에 도와주고 있는가 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점점 빗줄기가 강해진다. 굳이 방수자켓을 꺼내지는 않았다. 왠지 그냥 비를 맞고 싶어졌다. 내리는 빗방울 마저도 기운을 내려주는거 같다. 지금 상태는 어떤것이듯 상관이 없어진 상태다. 기분이 좋지도 그렇다고 힘들어서 나쁘지도 않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 심장의 박동과 호흡과 몸의 움직임이 하나로 이어진다. 딛고있는 흙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줄기 그 사이의 나. 생각은 없어진다. 내 몸을 타고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피니시에 대한 생각은 더이상 나지않는다. 달리고 있다. 그저 달리고 있는 나만 존재하고 있다.



M13 → FINISH | 신덕산마을 → 장수종합경기장(165.2km → 170.8KM)

10/28 일요일 10:59 도착 (43:59:16)


마지막 CP를 지나친다. 더이상 보급도 휴식도 필요치 않다. 미안하게도 형님들을 앞질러 그저 달리고 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형님은 나보다도 더 베터랑이다. 늦기전에 먼저 가라고 했다. 비는 쏟아지고 마지막 CP를 그냥 지나치며 달려간다.

비가오는 날의 다운힐. 미끄럽고 위험하다. 마지막 코스는 여전히 생생이 기억에 남아있다. 업다운이 있지만 달리기 좋은 코스였다. 작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달려나간다. 활공장에 올랐다. 100K선수분들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여기까지 왔다면 무슨 상황이든 좋지 않을까. 활공장을 곧바로 달려 내려갔다. 뒤에서 들리는 ”아니 100마일을 달려와서 어떻게 뛰어내려가세요. 100마일러는 다르네!“. 1년전 나 역시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달려가는 100K 선수들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달릴수 있는거지?’ 충격을 넘어 공포심이 들었다. 나는 불가능할거 같은 공포심. 그리고 이어지는

경외심. 나도 ’달리는 사람‘이 되고싶다.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래야만 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면 더 위험하게 넘어진다. 그건 비오는 날 트레일

레이스를 경험해본 자만이 알수있다. 진흙을 뒤집어쓸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트레일 러너의 자세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앞에서 누군가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레이스 중에 러너끼리 싸우는 일은 없다. 특히 울트라 트레일 러너라면 모두가 동지다. 서둘러 다운힐을 할려는데 누군가 홀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이렇게 미끄러운 길을 어떻게 내려가냐고 마구 화를 내고있다. 넘어지지 않으면 못 내려간다라고 말해주고 몸소 보여 줬다. 온몸에 진흙이 뛴다. 이미 바지는 진흙으로 코팅 중이다. 미안하지만 지금의 리듬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내가 보여준데로 하면 충분히 잘 내려 오리라 믿는다.


이제 마지막인 고분을 오르며 끝이라는게 실감이 난다. 이 순간을 상상도 하지 않았다. 다음을 미래를 생각 할수 없을 만큼 매 순간 최선을 다 할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힘든 레이스 였다. 마침 내려주는 비가 잔인하고 처절했던 100마일이 더욱 처절하게 만들어준다. 고분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피니시 라인이 있는 종합경기장으로 들어간다. 까랑까랑 씨끄럽게 울리 벨 소리와 열혈히 환호해주시는 MC분들과 현장에 계신 많은 분들. 언제 어디서 이런 환대를 받아볼까.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길고길었던, 잔인했던 레이스가 끝이 났다. 누적거리 170.8km 누적고도 9,589m

Get it done

끝을 냈다.

장수 트레일 레이스 공식사진-피니시 후






100마일을 끝내고


0 to 100 프로젝트

7월부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준비기간은 대략 1년정도 된다. 100마일이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다는 소문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2025년은 오로지 100마일 하나만 보고 준비했다.

다행히도 실제로 100마일이 개최됐고 운 좋게도 접수에 성공했다. 어차피 어떤 미친 인간이 100마일에 접수 할까. 그렇게 미친 인간들이 112명이나 된다. DNS(참가를 포기한 경우)를 포함하면 120명이다. 아마 당분간은 참가인원이 제한인원보다 적을거 같다. 고로 참사접수는 100% 당첨.

안타까게도 112명중 완주자는 43명에 불과하다. 완주율이 38.4%

그만큼 극악의 난이도 였다. 코스도 코스지만 타이트한 컷오프 타임이 한몫 했을거 같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100마일을 완주 했다는게 크게 감흥이 없다. 엄청난 성취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와이프도 아들도 ‘응 완주했네’ 정도의 분위기다.

기쁨도 고통도 순간이다. 순간이 지나면 모든건 희미해진다. 하지만 과정은 남아있다. 한여름 더위를 맞아가며 달렸던 과정들. 밤새 산을 오르내렸던 과정들. 긴장과 설레임에 잠 못 이룬 날들. 스타트 라인 뒤에서 피니시 라인을 넘어서던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들. 지금은 과거가 되버린 과정들. 그 과정들을 쌓아 현재의 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완주든 DNF든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사건일뿐이다.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건 오로지 현재 뿐이다. 그 현재는 바로 내가 만들고 있는 과정이다. 100마일을 완주했다고 대단한 사람이 되는게 아니다. 별볼일없는 그냥 하나의 사건일뿐이다. 사건들은 빠르게 잊혀지지만 과정을 만들어가는 현재의 나는 여전히 남아있다.


현재를 살아라

무의미하게 들렸던 이 말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두번째 후기

이렇게 0 to 100 프로젝트를 마쳤다.

부상에서 달릴수도 없을거 같은 순간에서 부터 부상을 극복하며 100마일까지의 여정.

1년이 넘는 긴 여정 이었다. 부상에선 완전히 회복했고 100마일을 견뎌냈으니 더 강해졌다고 봐도 무방할거다.

지나간 일은 과거에 남겨두어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선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0마일에서 100마일이 아닌

0% 에서 100% 프로젝트

0 to 100 프로젝트 두번째

0%의 삶에서 100%의 삶까지

내가 느꼈던 120%의 충만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점에서 선으로

그래서 다시 달리고 있다.

더 많이 경험하고 공부해서 변화되는 과정을 본다면 그것 또한 나의 과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낼수 있을지 알수없다.

다만 언제일지 모를 그날을 위해 계속해서 과정을 쌓아 나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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