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맞다 -2023 JTBC 서울 마라톤 풀코스 후기-
인생은 마라톤이라던데, MBTI 대문자 T에 호기심이 많아 뭐든 경험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첫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고 왜 그토록 사람들이 마라톤에 열광하는지 이해해 버렸다.
마라톤 하면서 깨달은 인생과 마라톤의 닮은 점 몇 가지 풀어본다.
1. 비가 온다고 안 할 수도 없다.
하프마라톤 나갈 땐 안 그랬었는데, 2023 JTBC 서울 마라톤 풀코스 출발 전날 밤은 생전 처음 소풍 가는 아이처럼 두근거림에 잠이 안 왔다. 그래서 들어버린 새벽 1시경 비바람과 천둥 번개 소리.. 그렇다고 스타트라인에 서기도 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침엔 그치기를 기원했지만 대회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보며 에라 모르겠다 춥진 않아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택시에서 내릴 때 까진 아직 어둑한 하늘이었지만 점점 빗방울 사그라들더니 스타트라인에 설 땐 날이 개고 해가 떴다.
인생이 언제나 맑음이면 좋겠지만 설령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불더라도 시작은 해봐야 한다.
2. 같은 곳을 향해 달리지만, 저마다의 페이스가 있다.
참가자들은 이전에 마라톤 참여했던 기록에 따라 페이스 별로 A~D 그룹으로 나뉘어 출발한다. 기록이 없거나 기록이 느리면 D그룹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나는 운이 좋게도 대회 주관사인 뉴발란스의 협찬을 받아 A그룹에서 첫 번째 풀코스를 도전할 수 있었다. A그룹에서 뛰는 사람들은 보통 풀코스 마라톤을 3시간 30분 이내에 뛰는 실력자들이다. 계속해서 뛰다 보니 A그룹에서 출발했어도 포기한 사람, D그룹에서 출발했어도 나보다 훨씬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보였다.
인생도 누군가 지원해 주면 더 좋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표에 제일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뒤에서 출발했다고 해서 영원히 뒤에 있으란 법도 없다.
마라톤을 풀코스를 3시간 안에 들어오면 Sub 3(서브 쓰리)라고 하고 3시간~3시간 9분까지는 싱글 (한자리 수의 기록만 줄이면 서브 3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3시간 안에 못 들어와서 슬퍼하지만, 또 누군가는 다음번엔 더 잘 뛸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보기도, 완주를 한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워한다.
인생도 내 페이스대로 내 목표대로 즐겁게 살면 된다.
3.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은 정말 많다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으면 온 세상이 내 완주를 위해 응원해 주는 느낌이다. 주로에서 만나서 파이팅 하고 지나가는 주자, 주로 옆에서 응원해 주는 응원단과 길거리 시민들. 내 배번을 보고 내 이름을 외치며 멋지다 잘한다 외쳐주는 생전 처음 본 아저씨 아줌마들, 멀리서 GPS로 지켜보며 카톡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 사람의 목소리가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응원존에서 들리는 파이팅에 무거워진 다리에 부스터가 달린 듯 페이스가 빨라지고 다리가 잠깐은 가볍게 느껴진다. 너무 많은 사람의 목소리리는 정말로 힘이 된다.
피니시 라인 응원존 가기 전 끝에 5km 정도 남긴 지점에서는 주로에 주자도 비교적 적어지고 응원도 없어, 고독한 달리기가 시작된다. 여기서는 내가 나를 응원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입으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되뇌다 보면 마지막 피니시 라인에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내 삶도 혼자 알아서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내 곁에 가족, 친구, 동료들이 보이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응원해 주고 있기에 잘 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가장 든든한 응원군은 나 자신이다.
4. 포기하는 것도 용기다
훈련하면서 달리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기고, 지난 10월 서울 달리기 하프에서 전에 뛰어본 적 없던 속도로 하프를 달렸다. 2시간 55초의 기록으로 PB를 했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발목에 무리가 있었고 그래서 그 이후에 있던 훈련은 제대로 다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풀코스 출발 전까지 몇 번의 훈련은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쉽고 억울한 마음에 짜증의 눈물이 난 적도 있었고, 달리기가 재미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같이 마라톤을 훈련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들이라 부러운 마음에 조바심도 났지만 코치님이 부상관리를 잘해서 스타트라인에 서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해서 마지막 2주는 정말 달리기를 거의 쉬었다. 덕분에 커다란 통증 없이 목표기록보다 훨씬 빠르게 완주했다.
마라톤에서 대회를 중도 포기하는 것을 DNF (Did Not Finish)라고 한다. 그런데 부상이 있다면 포기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 마라톤 대회가 이번 한 번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삶에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자세는 중요하지만 그래도 다음 기회를 노리는 지혜 역시 중요하다.
5.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다면
나에게는 첫 번째 풀코스 마라톤이었기 때문에 비교대상이 없어 일단 뛰고 보자였지만, 이번 JTBC 마라톤은 비도 오고 오르막 내리막도 꽤나 많았던 쉽지 않은 코스였다고 한다.
사실 30km가 지난 시점이 오면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근육이 오래된 탄성 없는 고무처럼 점점 굳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응원에 힘입어 달리고, 서울시 풍경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35km.
이쯤 되면 달린 거리가 아까워서 라도 포기보다 완주가 쉽다. 나는 다행히도 지난여름부터 훈련을 한 덕에 큰 부상 없이 기대 이상의 기록으로 완주를 했지만, 완주 지점 몇 미터를 남기고 쓰러지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풀코스 제한시간인 5시간이 지나면 교통통제가 풀린다. 그러면 대회장 피니시 라인도 철수하고 도로를 달리던 주자들은 시티런으로 변경해서 신호등으로, 보도블록으로만 달려야 한다. 피니시 라인이 철수 했으니 대회 기록증 또한 없을 수 있다.
싱글렛에 헐벗은 주자들과 여전히 그들의 완주를 응원하는 시민들, 교통정리에 힘쓰는 경찰관이 섞여있는 다소 복잡하지만 뭉클한 풍경이다. 제한시간은 지났지만 포기할 수 없는 그 심정이 공감이 되어 나도 속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공식 기록증은 없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린 그들도 어쨌든 풀코스 마라톤 완주자다. 내가 만약 같은 상황이었다면 포기하지 않고 인도로 끝까지 달릴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자신이 없다.
인생에서도 목표를 이뤘는지 아닌지는 남이 인정해주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
6. 힘든 건 지나간다
마라톤 풀코스 42.195km는 쉬운 거리는 아니지만 뛰다 보면 어쨌든 끝이 난다. 달리기 전에 누군가 써놓은 마라톤 꿀팁에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숫자를 5부터 거꾸로 세어보면 좋다고 했다. 그래서 무릎에 통증이 느껴질 때, 발바닥이 조금씩 아파올 때마다 속으로 5,4,3,2,1 세면서 달렸는데 이게 정말 효과가 있다.
27km 지점 지나서 아차산 터널을 달리는데 어둑어둑했던 터널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간다. 비에 젖어 힘들고 추워지고 발은 질퍽거리는데 터널을 울리는 함성소리에 나도 신이나 같이 소리지르며 뛰어나오니,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이 내눈 앞에 펼쳐졌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인생에서 힘든 일이 찾아올 때, 이젠 "그래 빗속의 마라톤 풀코스도 완주해 본 사람인데 이쯤이야." 라는 생각을 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어둠 끝에 빛이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언젠간 끝이 난다. 힘든 건 지나간다!
30km 지나 먹는 초코파이의 맛, 두 다리로 서울을 가로질러 달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응원에 힘 입어 부스터 아이템 쓴 듯 빨라지던 내 다리, 처음 보는 나의 이름을 불러 응원하려 내 배번을 집중해서 보던 사람, 피니쉬 라인을 뛰어 들어 올 때의 감동과 벅참. 그걸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마라톤은 정말 많은 경험과 감정을 선사했다.
마라톤 풀코스는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해볼만한 경험이다.
인생과 마라톤의 다른 점이라면, 인생은 한 번 뿐이지만 세상에 마라톤 대회는 많고, 이번 마라톤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 풀코스 마라톤이 아니라는 강렬한 예감이 든다. 이미 다음 달 하와이 풀코스 마라톤이 기다린다.
이번 마라톤을 연습 삼아 더 나은 달리기를 하는 내 미래가 기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