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너무 짧게 만난 LA
시차 적응 때문에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푹 잤다. 아홉 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씻고 준비를 마치니 어느덧 열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숙소 문을 열고 나가자 미친 듯이 좋은 날씨가 반겨줬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에 숨 쉬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새파란 하늘이 아무런 방해 없이 눈을 가득 채웠다. 이게 그 LA 하늘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이 LA를 둘러볼 수 있는 유일한 하루였다.
민이와 LA 어디를 가볼지 고민하긴 했지만,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정하지 못했다. 딱 하나 정해둔 곳이 바로 '더 게티'였다. 아름다운 정원을 꼭 보고 싶다던 민이의 선택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더 게티 입장 예약이었다. 홈페이지에서 시간대를 골라 예약할 수 있고, 무려 무료다. 우리는 오전 열 시 입장으로 예약해 뒀지만, 정작 출발은 열 시 넘어서 했다.
배고 고팠다. 전날 밤 들렀던 세븐일레븐에 다시 들어가 치즈스틱 비슷한 요깃거리와 딸기 환타, 그리고 민이가 노래를 부르던 TIC-TAC 사탕을 샀다. 열 시 반쯤, 드디어 LA에서의 첫 일정을 향해 출발했다.
운전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여유 있게 달렸는데도 10~15분 정도 걸려 금방 도착했다. 주차도 어렵지 않았고, 안내를 따라가니 모노레일을 탈 수 있었다. 이것도 무료였다.
어딘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구조라 자연스럽게 멋진 풍경을 모노레일 창 밖으로 볼 수 있었다. 도로 너머로 언덕 곳곳에 고급 빌라인지, 별장인지 모를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와, 여기가 LA구나.' 감탄했다.
길지 않은 시간을 타고 올라가서 내리면 큰 건물이 하나 서 있다. 여러 언어로 된 안내 책자들이 놓여 있었고, "안녕하세요?"라고 친절히 인사해 주는 직원도 있었다. 더 게티의 입구이자 로비인 것 같았다.
로비를 지나면 작품들과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또 다른 여러 건물들이 있다. 예술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에 한 건물만 들어가 보고 나머지는 둘러보지 않았다.
사실 둘 다 시차와 싸우고 있었다.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완전하게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국 시간으로 치면 새벽 세네 시쯤, 가장 깊게 자고 있을 시간이긴 했다.
민이가 기대하던 정원은 생각만큼 나무가 울창하고 푸르진 않았고, 기대보다는 살짝 휑한 느낌이었다. 춥지 않았지만 LA 나름의 겨울이라 그런 건가 싶었다. 기대에 못 미쳤을 뿐, 정원이 별로이진 않았다.
걷다 보니 귀여운 미국 초딩들이 단체로 와 있었다. 아마 학교에서 견학을 온 듯했다. 학교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린 백인 아이들은 정말 적어 보였다. 역시 LA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섞여있구나 싶었다.
작은 카페에 들러 민이가 마실 커피 한 잔과 초코 머핀을 샀다. 날씨가 워낙 좋아 야외 의자에 앉아 잠깐 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평소 민이의 열정이라면 이곳저곳 다 둘러봤을 텐데, 졸음과 갑자기 생긴 콧물과의 싸움에 지쳤는지 비교적 쉽게 포기하고 이동하기로 했다. 알레르기 때문에 콧물이 나는 것 같다며 약국을 가고 싶어 했다.
아쉬울 것 없이 구글 지도를 켜서 다음 행선지를 찾아보니 '더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이 괜찮아 보였다. 게티에서 30~40분 정도 걸리고, 점심 먹기에도 안성맞춤 같았다.
중간 경유지에 평점 좋은 약국을 경유지로 설정하고 게티에서 나왔다. 나오는 방향의 모노레일을 타기 전에 25달러의 주차비를 정산 기계에서 미리 계산했다.
먼저 약국에 들러 ‘지르텍’ 알레르기 약을 샀다.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우리나라 비염약 가격이 아니었다. 23달러 정도였으니 3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다. (알약 개수가 많긴 하다.)
계속 구글 지도를 따라가다 보니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집들과 상점들이 있는 동네가 나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부촌이라는 Beverly Hills였다. 뮤직비디오나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동네 구경을 잠시 내려서 구경할까 싶었지만 차 안에서 보는 걸로 만족하고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파머스 마켓에 도착하니 오후 한 시 반쯤이었다. 허기질 시간이기도 했고, 한국 시간으로는 막 일어날 시간이라 식욕이 다시 돌아왔다.
주차를 하고 한 바퀴 돌아보니 시장 느낌이 강하지는 않으면서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야외 테이블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점들과 디저트 가게들, 싱싱해 보이는 식료품 마트 정도가 있었다.
민이와 한참 고민하다 Corned Beef 샌드위치를 골랐다. 테이블에 앉아 한입 베어 물자마자 정말 짰다. 나는 Corned Beef가 옥수수를 먹여 키운 소인 줄 알았는데, Corn은 굵은소금 알갱이를 의미하고 소금에 절인 소고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 짠 게 맞았다.
이국적인 마켓 분위기만큼 완벽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무난한 끼니였다. 한 번쯤 들러볼 만은 하지만, 시간이 없다면 굳이 들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바로 옆에 있는 The Grove도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캔디 가게와 ZARA 매장을 시작으로 옷가게, 화장품 가게, 레스토랑, 영화관들이 쭉 이어진 쇼핑몰이었다. 끝에 있는 나이키 매장까지 걸어서 금방 갈 수 있을 정도라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았다.
풀밭에 앉아 여유롭게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2층 트램도 다니고 있어 분위기가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빈티지 가게와 나이키 매장을 잠깐 구경했는데 민이의 시선은 계속 2층 트램을 향하고 있었다. 결국 민이는 나이키 매장 앞에서 거침없이
“Is it free?”
라고 물어봤고, 우리는 트램에 올라탔다.
솔직히 처음엔 ‘이걸 왜 타지?’ 싶었다. 그런데 2층에 올라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그로브를 내려다보니, 공짜인데 안 탔으면 조금 아쉬웠겠다 싶었다.
나는 조금만 어렵거나 귀찮으면 쉽게 포기하는 편인데, 이런 점은 민이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파머스 마켓에서 계산할 때 주차를 말하면 2시간 무료 주차가 가능하다. 우리는 시간에 맞춰 민이와 함께 주차장을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초코 바나나 하나를 디저트로 사 들고 나왔다.
주차장에 잠시 앉아 다음 목적지를 고민했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막상 가보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LA FC 구장에 들러 종선이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었고, 민이는 LA FC에 가서 선물도 사고 천문대에서 일몰도 보고 싶은 눈치였다. LA 도심의 정체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이미 여러 번 들었기에, 도심에 들렀다가 일몰 전에 천문대에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해 보였다. 초조하게 서두르며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종선이 선물 사러 LA FC 구장에 가자”라고 말하면, 민이는 분명 좋다고 하면서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보자고 할 것 같았다. 타임어택처럼 움직이며 시도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시차와 콧물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컨디션을 생각하면 민이의 열정이 담긴 도전은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일몰 전에 그리피스로 서둘러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LA 도심을 제대로 구경할 기회는 사라졌고, LA FC 기념품 샵에도 가지 못하게 됐다. 한두 시간만 더 일찍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잠깐 스쳤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길도 한 번 잘못 들어 약간 헤매다가 그리피스 천문대로 향했다.
코리아타운 끝자락을 지나갈 때였다. 길 곳곳에 홈리스들이 보였고, 버스 정류장에는 카트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점 창문과 문에는 도둑을 막기 위한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아왔던 부촌의 풍경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라, 낯설면서도 묘하게 긴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풍경이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 주차를 열심히 찾아보니 천문대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있는 ‘그릭 시어터(Greek Theatre)’ 주차장이 무료라는 정보를 발견했다. 공연이 없는 날에만 무료라니,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주차장 바로 건너편을 보니 언덕 방향으로 버스 정류장이 하나 있었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보니 천문대로 올라가는 버스 정류장인 것 같았다.
민이와 나도 후다닥 달려가 줄을 섰다. 버스는 금방 오지 않았고 20분 정도 기다렸다. 그 사이 우리 뒤로 사람들이 계속 몰려왔다. 괜히 우리가 타이밍을 잘 맞춘 것 같아 민이와 유치하게 좋아했다.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올라가니 금방 도착했다. 내리니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해가 막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 멀리 석양과 함께 할리우드 사인이 보였고,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노랗게 물든 LA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도, 눈에 띄게 튀는 구조물도 없이 블록들 위에 넓게 펼쳐진 도시의 풍경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대충 찍어도 잘 나오는 사진을 열심히 찍으며 그 풍경을 즐겼다. 평소 관광지를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관광지는 또 관광지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데에는 역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영화 라라랜드의 배경이라고 해서 미리 보고 올까 했지만, 나는 러브스토리 영화를 좋아하지 않고 민이는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굳이 보지는 않았다. 언젠가 LA 여행이 그리워질 때 그때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라라랜드를 보지 않았더라도, 이곳은 LA에서 충분히 들러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해 질 녘이라면 더더욱.
천문대 내부도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천문에 대한 여러 전시를 볼 수 있었지만, 깊게 보지는 않고 민이와 함께 한 바퀴 훑어보는 정도로만 구경했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이미 해는 완전히 져서 주변이 깜깜해져 있었다.
천체망원경을 볼 수 있는 줄이 있었는데 민이가 꼭 보고 싶어 했다. 줄을 서 보니 앞에 세네 명 정도밖에 없어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민이가 먼저 보고, 나는 뒤에서 ‘저게 뭐가 그렇게 보고 싶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경을 다 한 민이와 직원분이 나를 부르며 보라고 해서 못 이긴 척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와… 토성의 고리가 살짝 보였다.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민이는 오늘 일정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순간이라며 굉장히 흡족해했고, 나도 그 말에 100% 동의했다.
망원경 앞에는 천체와 망원경 설명을 해주고 망원경의 위치를 잡아주는 직원이 계셨다. 민이 차례 때 키 때문에 망원경 높이를 조금 조정해야 해서 민이가 “Sorry”라고 했더니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왜 미안하다고 하냐고. 저 수많은 별들도 모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사람도 다 다른 건 당연하니 그런 건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친절이라고 넘기기에는, 어딘가 마음에 오래 남는 말이었다.
오후 일곱 시가 다 되어갈 무렵, 민이와 나는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다. 걸어내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어 위험하진 않다.
첫날이라 지치기도 하고 저녁 먹고 오늘의 일정은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래서 숙소 근처 동네에 가서 저녁 먹고 시간이 되면 동네 탐방을 하기로 했다.
민이와 아보카도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먹고 바로 앞 Trader Joe's 마트로 가서 챙겨 오지 않은 바디워시를 샀다. 쿠키를 하나 집었는데 지금도 잊지 못할 만큼 진짜 맛있고 진했다.
아쉬운 마음에 숙소 건너편 바에 가서 맥주를 한잔할까 고민도 했지만,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하기도 할 것 같고 시차나 컨디션 관리 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았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Home Goods라는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을 잠깐 하고, 챙기지 않은 슬리퍼를 사려고 했다. 민이와 미국에 살게 되면 집에 필요한 집기나 가구들은 이런 데서 쇼핑하겠구나라는 헛된 상상을 잠시 했다.
LA에는 우리의 드림카인 도요타 프리우스가 정말 많이 보였다. 도시는 번잡하면서도 어딘가 느긋해 보였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밝은 표정이었다. 농담과 장난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분위기였다.
두어 번쯤 농담을 들은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건 오후에 길을 한 번 잘못 들어 꽤 비싸 보이는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내를 하던 아저씨 직원에게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하자, 그는 “큰일 났다”라고 말했다. 민이와 나 둘 다 놀란 표정을 짓자 웃으며 장난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나가는 길을 알려주겠다며 우리 차 앞에서 직접 걸어가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조금 더 여유 있게 LA를 즐겼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으니, 다음에 다시 온다면 익숙하지 않음과 환율에 괜히 주눅 들지 않고 훨씬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꼭 가볼 만한 도시다.
● Seoul ——— ● Incheon Airport ——— ● Seattle-Tacoma Airport ——— ● LAX Airport ———
● El Royale Hotel Near Universal Studios ——— ● The Getty ——— ● The Original Farmers Market(The Grove) ——— ● Griffith Observa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