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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개발자

개발자들이 얼마나 앉아 있냐만 보고 있는 관리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by 바람소리

엉덩이 개발자

십수년전 다니던, 어떤 회사에는 조그마한 외모와는 다르게 당차고, 씩씩하고, 그리고 꼰대스러운 팀장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아주 가끔 사무실 전체가 들을만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팀원들을 혼내시곤 했는데요.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엉덩이 개발자"입니다. '개발자는 엉덩이로 작업하는 사람이다', '안되면 될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뭐 이런게 그 팀장님의 지론이었지요. 당시로서도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이제 저는 당시 그 팀장님보다 나이도 경험도 더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산업계도 역시 변화해서 주40시간 근무가 의무적으로 시행되고 있고요..

이제는 그 팀장님 지론이 완벽하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발자는 엉덩이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머리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주52시간도 모자르다는 인터넷 신문 기사를 접했습니다. 눈을 의심했습니다. 더 충격적인건, 기사의 댓글이었습니다. 기자의 논조에 동의하는 다수의 댓글이 있더군요. 솔직히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코딩, 더 나아가서 지식 노동은 머리로 하는 것임을 이야기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모던 타임즈

1936년 찰리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로 당시 사회상을 비판했습니다. 단순 작업을 무한히 반복하다가 거대한 기계에 휩쓸리는 모습은 그 시대가 노동자들이 거대 시스템의 부품으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풍자합니다. 이런 사회상의 중심에는 테일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테일러는 조직 관리에서 노동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하게 부정했거든요. 라즐로 복의 <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에 나오는 테일러의 발언을 통해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선철을 다루는 일은 굉장히 어렵고 힘들어서 그 일을 육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으며,
이 일을 자기 직업으로 선택할 정도로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선철을 다루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멍청하다고 판단했던 테일러는 노동자들은 단순한 일을 하고 관리자들이 지식을 가지고 통제하는 게 시스템 전체의 효율을 높이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죠.


단절의 시대

1969년 피터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라는 책을 썼습니다. <단절의 시대>에서는 '지식 사회', '지식 근로자' 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요.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될 때, 피터드러커는 '지식 사회'가 현실화되었다고 평가 했습니다.

지식없이 몸만 움직이는 것을 노동이라고 보던 시대에서, 지식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을 노동으로 보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그럼, 노동자들을 무식쟁이로 여기던 테일러의 방식은 쓸 수 없게 됩니다. 특히 고도의 지식을 필요하는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는 더더욱 테일러의 방식을 그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피플웨어

1987년 1월 1일, '톰 디마르코'는 <피플웨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사람"이 하는 것임을 설파한 책이었습니다.


테일러 주의 관점으로 볼 때, 노동자에게 업무를 주면 업무가 끝나는 시간을 관리자가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동자가 회사에 오래 남아 있다는 건, 그만큼 일을 많이 한다고 판단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노동자가 회사에 오래 남아있으면 잘돌아가는 거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한편, 지식 노동은 '몰입'을 동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문에, 일 중독에 빠진 개발자들은 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 두가지가 조합되고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합니다.

몇 년 전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대규모 프로젝트 관리자와 프로젝트 무용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업무 시간이 팀원들에게 끼친 영향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야근 때문에 이혼한 사례가 2건이었고, 1년 내내 바빴던 아버지가 아마도 양육에 참여하지 못한 탓에 팀원 자녀 중 한 명은 약물 남용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테스트 팀장이 신경쇠약에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끔찍한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 놓았고, 어느 순간 나는 그가 나름 이상한 방식으로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혼 한 두 건과 자살 한 건 정도만 더 있었어도 프로젝트가 완벽하게 성공했으리라 믿는 듯 말이다.

<피플웨어> 3판

노동자 개인의 삶이 파탄에 이르게 됐습니다.

회사 전체가 일중독에 빠져서 허우적대면서, 그게 '선'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죠. 물론, 그런 집단적 '중독'상황에서는 모두 '행복'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파탄에 이른 자신의 삶을 보게된 노동자는 중독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보게 됩니다. 말도 안되는 일정을 강요하는 관리자도 그리고 아직 일중독에 헤메는 동료도 보게 됩니다.

그럼 회사를 관둘수밖에 없겠죠.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테니까요.


본질적 작업

브룩스는 <맨먼스 미신>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은 그 구조를 다루는 '본질적 작업'과 구현을 다루는 '부차적작업'으로 나눈다고 말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성공하려면, '본질적 작업'이 잘 이루어지는 게 중요한데요. 이 부분은 고도의 전문성과 창의성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피로한 두뇌는 할 수 없는 일이죠. 앞에서 우리가 봤던 일중독자들은 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일중독자들이 주로 보는 영역은 '부차적작업' 영역인데요. 즉, 코드를 얼마나 많이 작성하는지, 눈 앞에 이슈를 얼마나 많이 해결했는지만 봅니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구조를 망치면서 일을 하면서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죠.


테일러 주의적 관점을 가진 회사가 강요하는 장시간 노동은 허술한 구조와 보이지 않는 버그를 많이 가진 소프트웨어를 만들게 되고 변경이 힘든 코드가 됩니다. 일주일이면 해결할 수 있었던 일들이 점점 더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고 어느 순간 부터 개발자들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장을 대응할 수 없는 회사는 살아남기 힘들게 되지요.


위기를 느낀 회사의 중역들은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모아둔 돈이 있다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어보기도하고, 조직내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관리자를 내보내기도 합니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개발자를 내보니기도하고요.


그러나 어떤 노력도 회사를 살릴 수 없습니다. 어차피 테일러 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 테니까요. 개발자가 회사에 오래 있다고 좋은 코드를 작성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회사는 개발자들의 엉덩이만 보고 있을게 아니라 그들이 두뇌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하루 일정 시간 동안 몰입에 빠지도록 유도하고 중독에 빠지지 않게 칼퇴근을 유도해야 하고요. 충분히 휴식을 취해서 경쟁력 있는 소프트웨어 구조를 만들게 해야 하죠.


오늘도 개발자(또는 지식 노동자)들의 엉덩이만 바라보고 있는 관리자가 있다면, 회사와 개발자와 그리고 자신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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