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지난 몇 달간의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UX/UI 디자이너로 전향한 지 약 1년이 되어갈 즈음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거든요.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UX는 정녕 무엇인가? 나는 왜 이 일을 하기로 했을까? 디자인을 잘한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과연 이 업계가 정말로 나와 맞는 걸까? 다른 일을 하는 게 맞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제 머릿속에 가득 차 버렸습니다. 때때로 그랬듯,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채 파도에 휩쓸리는 돛단배가 된 기분이 또 찾아온 거죠.
밝게 빛나던 등대에 의지해 나아가고 있었는데, 서서히 꺼져버린 불빛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떠내려 가고 있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을 땐 분명 선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경험과 실력을 쌓아 나중에 영향력 있는 멋진 서비스를 직접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죠. 그러나 1년간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들을 겪고 실무에 매몰되어가면서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방향을 잃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장도 정체되었습니다. 게다가 제 부족함으로 스스로를 잘 돌보지 못한 탓에 큰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에 이상이 왔죠.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잠시 '일시정지'하기로 선택했고, 한동안 스스로를 충분히 돌아보고 채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 'B2B (Back to Beginning/Basics)'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지금이 아니면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돌볼 시간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돌아가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어요.
처음으로, 본질로 돌아가자!
처음엔 돌아가면 뒤쳐질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그러나 상담, 명상 그리고 책들은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제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빨리 결과물을 만들어야 된다는 조급함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성급히 포트폴리오부터 만들기 전커리어의 방향성을 분명히 하고 약한 기본기도 탄탄히 다시 다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멀리 가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습니다. '내가 왜 디자인을 시작했고, 앞으로 왜 계속하고 싶은지, 어떤 디자이너로 성장해서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등'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스스로를 돌보며 이런 고민을 한지 한 달 정도 지났을 즈음 다행히 어느 정도 마음의 평안을 찾았고, 조금씩 의욕도 차올랐습니다. 선반에 꽂혀만 있던 디자인 고전들도 다시 들여다보며 이 분야에 대해 깊이 탐구해보고, 부족했던 디자인 스킬도 연습하고, 관심 있던 온라인 강의도 신청해서 듣고 있습니다.
현재 수강 중인 강의의 강사이자 Google의 디자이너인길버트 한 (Gibert Han) 또한 첫 강의에서 스스로에게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를 자주 물어봐야 한다고 강조하더군요. 그는 디자인할 때 항상 디자인의 목적, 영향, 가치 기준을 생각하고, 그 디자인이 주변과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상상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며 가치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좋은 삶을 선사하는 것이 좋은 디자이너의 소양이며 존재 가치인 것이죠.
<그릿> / 앤절라 더크워스, 2019 (100쇄 기념 에디션)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책 <그릿(Grit)>에서도 상위 목표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릿의 핵심 요소는 열정과 끈기인데, 그중 열정의 원천이 되는 것이 뚜렷한 목적의식입니다. 책에서 다양한 사례로 제시된 그릿의 전형들은 모두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 대한 강력한 이타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일을 단순히 생업이나 직업이 아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주는' 천직이라고 믿었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 또한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가 역시나 '목적의식의 상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일을 더 잘 해내는 사람이거든요.
처음 이 업계로 발을 들이기 전에는 분명 이타적 목적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땐 어떤 것도 빠르게 배우고 해낼 수 있다는 열정이 타올랐었죠. 그러나 바쁘게 지내는 와중에 그 목적의식을 항상 상기하려고 노력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자연스레 목표는 희미해지고 열정도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다행히 <그릿>의 저자는 흥미와 관심, 그리고 열정은 절대로 저절로 생기거나 유지되지는 않으며, 다양한 경험과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열정이 사그라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제 의지 부족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조금은 위로가 되네요.)
물론 이게 변명의 이유가 될 수는 없겠죠. 앞으로 제가 선택한 이 분야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앞서 언급한 훌륭한 멘토들의 조언대로 한번 정한 길을 한 눈 팔지 않고 끝까지 가보려 합니다. 자꾸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매일 딱 한 걸음씩 말이죠.
10주 넘게 달리기 하면서 배웠어요. 멀리 가려면 무리하지 말고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높은 목적의식과 관심을 갖고 의식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면, 언젠간 수준 높은 전문가로서 말라가는 세상 속 단비 같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면서요.
그때까지 등대의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제 일의 목적과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디자인을 선택한 이유는 나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이 다짐을 기억하며 사랑하는 이들의 문제 해결을 넘어 그들에게 '기회'를 선물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는 그 날까지,오늘도 배우고 성장하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