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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Jan 19. 2024

#0. 시절인연

- 인생불변의 법칙, 사랑 : 프롤로그

띠리릭- 도어록 해제 되는 소리와 함께 '첫차'의 문이 열렸다.

이영은 저녁 노을빛이 연하게 비쳐드는 가게 중앙을 곧바로 질러 낡은 카세트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새벽 안개 헤치며 달려가는 첫차에 몸을 싣고 꿈도 싣고~ 내 마음 모두 싣고 떠나갑니다 당신을 멀리멀리"


카세트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음질의 노래소리를 잔잔하게 허밍으로 따라하는 이영이 선명한 노을빛을 마주하고 섰다. 그녀의 몸을 뚫고 지나는 노을빛을 온 몸으로 맞으며 혼잣말처럼, 어쩌면 자조 섞인 듯,


"오늘은 또 어떤 시절인연이 오시려나."


조용히 읊는 이영의 실루엣이 노랗고 뻘건 묘한 빛에 흡수돼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곳에 머무르게 된 것은. 머나먼 태고의 일처럼 아득하기도, 이제 막 이삿짐을 풀고 느른한 저녁 노을에 몸도 마음도 기대고 있는 것 같기도.

이영의 이곳에서의 생활은 대체로 오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 한 귀퉁이를 가만히 내어주는 일상이었다. 실연의 아픔으로 뒹굴며 술에 취해 눈물 콧물 짜는 누군가의 등을 몇 번이고 그저 쓸어주는가 하면. 아프게 누군가를 보낸 후, 세상 한 쪽이 무너진듯 절망에 휩싸인 누군가의 빈 잔을 말갛게 보다 말없이 술잔을 채워주기도 하면서.

반복되는 매일이 지루하고 늘어질 법도 했지만, 이영은 지금의 날들에 크게 불만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인생 시간 중 가장 행복에 가까운 날들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가 첫차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은 건 그랬다. 인생불변의 법칙은 사랑이라고. 누구에게나 있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한 번쯤은 해봐야 하는 것. 사람이라면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비가 온 뒤 땅내음이 깊어지는 것처럼, 진할수록 향기가 짙어지는 그런 것. 사랑 때문에 날카롭게 베이고 쓸린 흔적 하나쯤 훈장처럼 새겨져 있는 게 인생이라고.


흐릿한 기억 속 새벽 미명. 멀리서 뿌연 안개를 가르며 플랫폼 안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보며 이영은 이를 악 물었다. 두 번 다시 혼자는 돌아가지 않으리.

그날, 그렇게 첫차에 홀로 몸을 실었다.

연고지도 없는 '무오리'에 정착하기로 했던 것은 딱 한 순간의 마음 때문이었다. 첫차를 타고 정처없이 흘러가던 그날, 무심결에 본 소나무 한 그루에 이끌려 그대로 기차에서 내려버렸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아름드리 품격이 있는 모양새도 아닌. 그저 소담한 무오리역 옆에 잠잠히 곁을 내어주고 있는 모양새에 퍽 마음이 동요했으므로.


'저 소나무처럼 그저 이 자리에 있으면, 언젠가는….'


이영의 머릿속에 사람의 마음을 잘 흘려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쯤이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선술집도 아닌, 밥집도 아닌, 그냥 오다 가다 발걸음이 닿을 수 있는 나그네의 공간, <첫차>가 생겼다.

첫차의 주인장, 싸장.

그녀는 신비주의다. 여자라는 성별을 빼곤 그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이도, 이름도, 사는 곳도, 어디에서 무얼 하던 사람인지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꼭 여기에 있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무오리에 스며든 인물이었다.

무심한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흔을 훌쩍 넘은 얼굴이기도. 해사하게 웃는 낯에선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수줍은 대학생 같은. 골몰하게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면 서른쯤 되는 성숙한 여인이기도. 언뜻 보면 아이처럼 순둥한 앳된 얼굴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곳을 오고 가는 손님들은 그녀를 그저 "싸장"으로 부른다.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라도 "싸장"이라는 호칭은 부담 없이 부를 수 있기에.

첫차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받아들인다는 게 그녀의 철칙. 가게는 오후 5시부터 새벽 3시까지. (정해진 룰은 그렇지만 문을 닫는 시간은 그녀의 마음이다. 어떤 손님인가에 따라 시간을 더 내주기도 하니까.)

가게의 정해진 메뉴는 달랑 백반 하나. 하지만 메뉴에 상관 없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음식이라면 그게 뭐든 주문이 된다.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면 내가 먼저 떠나가야지~ 꿈같은 세월, 짧았던 행복, 생각이 나겠지만~~ 아쉬운 정도, 아쉬운 미련도, 모두 다 잊겠어요"


낮게 허밍하며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 이영이 주방으로 향했다. 이제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그 시각.

저벅저벅저벅. 툭툭 끊기는 두 다리를 이끌고 첫차로 향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영이, 지켜줘야 할 마음을 든 채로.

천천히 첫차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손의 움직임에 이끌려 촤르릉- 출입문에 달린 드림캐쳐의 맑은 울림이 가게 안을 메운다.


첫차의 시절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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