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의 이야기 6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말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내 사랑은 안 그럴 줄 알았지. 세상에 변하는 게 어떻게 사랑이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착각이었던 거다.
사랑은 변한다. 그리고 사람도 변한다.
제 눈앞에 나타난 그가,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환상과 착시를 불러온 건 아닐까. 아니면 이제는 스스로가 미쳐버린 건지도 몰랐다.
태선우가 어째서?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너무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기 때문일까.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그동안 우리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선우는 4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그대로인지. 자신만 시간을 야금야금 좀먹고 있었나보다.
그때였다. 지우를 똑바로 응시한 선우가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꼼짝도 않고 서 있는 지호가 그날처럼, 예고도 없이 자신의 반대 방향으로 걸을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다가가는 걸음에 묻어나지 않도록. 선우는 꼭꼭 다지듯 걸음을 뗐다.
하나둘... 앞으로 열 걸음. 지호는 선우가 자신 앞에 서게 될 걸음의 수를 세고 있었다. 앞으로 일곱 걸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돌아설까. 선우가 코앞에 있다. 세 걸음. 마주보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한다. 지금 발을 떼면 늦지 않는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단단히 고정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빨리... 제발...' 마음속으로 애타게 말해보지만 두 발은 꼼짝도 않는다.
선우가, 왔다. 지호에게로. 그녀의 앞으로. 선우가, 본다. 자신의 이마를, 눈을, 콧대를, 입술을. 찬찬히 제 눈에 새기듯 하나하나 담아내고 있었다. 애틋하고도 처연하게. 그가 마른 입술을 뗀다.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온다. 지호의 귓가에 낮고도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울린다.
"잘, 지냈어?"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와 표정. 담백한 인사였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는 게 맞는 건가. 우리에게 일어났던 지난 일은 이 한마디로 정말 괜찮은 걸까. 왜. 도대체 왜, 너는 내 앞에 서 있는 걸까. 마음속에 피어나는 무수한 질문들을 삼키고, 지호는 그저 담담한 눈으로 선우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선우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꼭 그때 같다, 서지호. 맹장 터져서 처음 우리 병원으로 온 날."
지금에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왜 선우는 지난 이야길 꺼내는 걸까. 지호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처음 드레싱 하러 갔던 날 말야. 서지호가 지금 딱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거든, 날."
선우를 어떤 눈으로 바라봤었더라. 이 남자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었지? 아스라한 기억속에 남아 있을까. 태선우를 보던 서지호가. 거기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 아니다. 찾고 싶지 않다.
"말 좀, 해봐. 응?"
아득해진 정신이 다시 선명하게 돌아왔다. 환상이 아니었다. 꿈도 아니다. 착시도 아니다. 태선우다.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태선우가 분명 맞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을 말 같은 게 남아 있을 리 없는데, 참 이상하지. 이 남자는 지금 자신에게 말을 하라고 한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지호는 선우와 마주한 시선을 거두고 뒤로 한 걸음, 거리를 물렸다. 그리고 꼭 멀어진 그만큼 선우가 다시 다가섰다. 지호가 다시 뒤로 한 걸음. 선우가 멀어진 거리를 채우기 위해 걸음을 뗄 때였다.
"오지마."
선우의 걸음이 주춤, 멈췄다. 선우가 단단한 표정으로 지호 앞으로 다시 다가서려는데.
"오지마, 태선우."
선우의 걸음에 다시 제동이 걸렸다. 지호가 멈춰선 선우의 발을 빤히 내려다보다 시선을 들어 그의 눈과 마주했다.
"한 걸음 더 오면, 태선우 두 번 다시 못 돌아가."
가만히 지호를 보던 선우가 대답 대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지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협박이었다. 안 놔 줄 거니까. 다가온다면 정말 다시는 안 놔줄 생각이었다. 선우를 손에서 놓고 나서야 알게 되었으니까. 이 남자 없이 진행되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볼품없이 시들어가고 있는지를.
그런데 이 남자가 겁도 없이 자신의 앞으로 다가선다.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 다시는 자신을 놓지 말라고 말하듯이.
그런데 4년 전 미현과 마주했던 그날이 겹쳐져 온다.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때처럼 선우를, 버리겠지. 평생을 이 남자를 그리워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리고야 말 것이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선우를 놔주지 않을 거라고 거세게 요동치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이제 안 가. 두 번 다시. 그러니까 서지호, 각오해. 죽을 때까지 네 옆에 붙어 있을 거니까."
이 남자가 미친 게 확실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멀쩡한 정신으로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자각하는 거지."
"여기 올 때 그 정도 각오도 안 했을까."
"나 세컨드로 안 살아. 태선우는 유부남이고."
"법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깨끗해. 정리 다 됐고 아무 문제 없어."
태선우답다. 묻는 말에 족족 깔끔한 대답이 흘러나온다. 그의 답이 언제까지 이렇게 유려할 수 있을까. 단단한 표정을 풀지 않은 지호가 선우에게 다시 물었다.
"집에서는, 여기 온 거 알고?"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그런 거 신경 안 써."
"태선우는 몰라도, 나는 아니야."
"너 빼고 다 버렸어. 내가 가진 거 전부. 나 거지야. 그러니까 서지호가 책임져."
책임을 지라니. 내가? 태선우를? 무슨 수로? 지호는 헛웃음이 흘렀다.
"4년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거지 됐으니까 태선우 씨를 책임지라고? 미친놈."
"왜. 너도 네가 버릴 수 있는 유일한 거 버리고 도망 갔잖아. 그 유일한 게 나였고. 아니야?"
순간 훅하고 명치께에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선우가 지호에게 반 걸음 더 다가섰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지호를 내려다보며 선우가 낮게 말했다.
"나도 너 빼고 다 버렸어. 내가 버릴 수 있는 거 전부.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있는데‥ 난 버릴 게 진짜 많더라. 근데 이제 태선우도 서지호랑 똑같아. 내가 버릴 수 있는 건 유일하게 너 하나 뿐이거든."
지호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틀렸어, 태선우 씨. 넌 여전히 버릴 게 있고, 난 이제 버릴 것조차 없고. 태선우랑 서지호는 같을 수 없어, 절대."
지호가 몸을 돌려 선우의 옆으로 두어 걸음 지나쳤다. 선우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팔을 낚아채 돌려세웠다.
"다시 시작해, 서지호. 버릴 게 없다면 다시 버릴 수 있게 채워 넣어. 그러면 돼."
"아니, 우린 이미 끝났어."
지호가 선우에게 잡힌 팔을 비틀어 빼내려고 했지만 선우에게 잡힌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지호가 그랬잖아. 두 번 다시 못 돌아간다며."
"제발... 놔줘."
"싫어. 안 놔. 안 놓을 거야. 아니! 안 놔줄 거야. 서지호 이제 다신 어디 못 가."
선우가 지호의 팔을 끌어당겨 와락 그의 품에 안았다.
"놔! 놓으라고 이 나쁜놈아!!"
지호가 선우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댔다. 그럴수록 그녀를 안고 있는 선우의 두 팔이 더 단단하게 지호를 감아 안았다.
"서지호가 포기해."
"뭘 포기하란 거야! 이제 와서 나더러 뭘 어쩌라고!!"
기어이 울음이 터져버린 지호. 선우의 품에서 가늘게 들썩이는 지호의 어깨가 애처로웠다. 애가 타는 얼굴로 더 바짝 지호를 끌어안는 선우.
"이기적인 놈이라 해도 어쩔 수 없어. 내 마음 안 변해. 내가 안 돼. 서지호가 아니면 이제 내가 안 된다고."
한참 들썩이던 지호의 어깨가 잦아들고. 여전히 선우의 품에 갇힌 채 그녀가 말했다.
"4년 동안 아무 연락도 없이 잘 먹고 잘 살다가 이제 심심해졌니? 가. 태선우 싫어. 진짜 정말 싫다고!"
"넌 내가 싫고. 난 네가 없으면 안 되고. 그럼 방법은 딱 하나네. 서지호가 날 다시 보게 만드는 거."
지호가 등을 뒤로 밀며 얼굴만 물린 채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선우의 얼굴을 마주했다.
"너 진짜 미쳤구나. 제대로 돌았어."
"돌았지. 서지호한테. 나, 제대로 미친 거 맞아. 그러니까 서지호가 포기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그때 멀리서 잔잔한 봄바람에 벚꽃잎이 사르락 날아와 선우의 어깨 위에, 지호의 머리칼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계절 찾아왔던 사랑처럼, 두 사람 사이로 노랫말이 흘러든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 김동률>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있었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괜한 우려였는지 서먹한 내가 되려 어색했을까
어제 나의 전활 받고서 밤새 한숨도 못 자 엉망이라며
수줍게 웃는 얼굴 어쩌면 이렇게도 그대로일까
그땐 우리 너무 어렸었다며 지난 얘기들로 웃음 짓다가
아직 혼자라는 너의 그 말에 불쑥 나도 몰래 가슴이 시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기다려왔다고
널 기다리는 게 나에게 제일 쉬운 일이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여전히 난 부족하지만 받아주겠냐고
널 사랑하는 게 내 삶에 전부라 어쩔 수 없다고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