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냥 좋은 건데.. 나더러 어쩌라구요

- 은강과 희락, 그리고 차희의 이야기 8

by 장해주

차희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미안함과 민망함, 복합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밀려든 탓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는 차희. 강은 그런 차희를 보며 다음 문장을 이었다.


“이제 각자의 일상을 삽시다. 이 만남은, 어떤 일상 중 일어난 서프라이즈 같은 거니까.”


차희의 눈동자가 처연하게 물들었다. 서프라이즈. 남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고만 싶다. 그게 아니라고. 우리의 만남은 한낱 이벤트 같은 게 아니라고.


“희락이, 한 번만 만날 수 없을까요? 아이에게 설명은 해주고 싶어요. 오늘 약속에 대해서.”


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윤차희 씨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을 거란 거, 압니다. 이해도 하고요. 그런데 아이의 마음을, 강요할 순 없습니다.”


차희가 천천히 끄덕였다.


“기다릴게요. 강요, 안 해요. 그리고... 미안해요.”


강의 맑은 눈동자가 차희의 연한 입술에 닿았다. 그녀의 미안하다는 고백이 하도 절절해서. 짧게 전하는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너무나도 깊어서. 강은 차마 더 차갑게 대할 수 없었다.

옅은 한숨을 내뱉는 강. 이 어정쩡한 관계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랍니까.”


가라앉았던 차희의 동공이 다시 흔들렸다.


“바라는 거...”


강은 차분하게 차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당신 좋아하면 안 되는 건가요...?”


순간 강의 목울대가 살짝 올랐다 내렸다. 목에 걸린 작은 가시처럼 자꾸만 갑갑증이 일었다. 이 여자는 어쩌자고 앞뒤 없이 자신에게 달려온단 말인가. 강은 대꾸 없이 가만히 차희를 응시했다. 차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 알아요. 대책 없고 물색없는 여자로 보이는 것도 알고요. 근데요.. 사람 마음이 그런 거잖아요. 그냥, 좋을 수 있잖아요. 나는 은강 씨가요.. 첫눈 속에 서 있던 그 남자에게 그냥 이끌렸던 거예요. 그냥 이런 건데. 나더러 어쩌라구요...”

KakaoTalk_20251107_173339220_05.jpg

첫눈의 얄팍한 꼼수에 홀랑 넘어간 게 아니라고 말하는 여자. 그냥 좋은 것일 뿐인데. 자기 마음을 어째야 하냐고 물어오는 여자.


“그 마음은 윤차희 씨 것입니다.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거죠. 근데 이런 식의 갑작스런 전개가 당혹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말을 마친 강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강은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자신과 차희 사이의 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거리였으나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딱 이 정도 거리가 좋을 거 같습니다. 더 가깝지도 더 멀지도 않은.”


차희의 시선이 강의 발로 떨어졌다가 다시 자신의 발치로 돌아왔다. 다섯 걸음 남짓. 차희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였다. 그녀 앞으로 다 시들어 고개를 꺾고 있는 프리지아 한 송이를 건네는 강. 희락이 준비했던 꽃이었다. 이게 뭐냐는 듯 빤히 강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차희. 강이 말문을 열었다.


“아이가, 희락이가 직접 골랐습니다. 윤차희 씨 주려고.”


꽃이 시들 때까지, 아이는 자신을 기다렸으리라. 차희는 소리 없이 두 손을 꾸욱 말아쥐었다.

stephanie-gibeault-Xum5jz7ctNw-unsplash.jpg

집으로 돌아와 시든 프리지아를 꽃병에 꽂은 차희. 소파 앞에 앉아 그 모양을 말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희락의 말간 웃음이 떠올랐다. 이 꽃을 고를 때 설렜을 아이의 꽃 같은 마음이, 오늘 저로 인해 시들었겠구나.


“희락이는 이상형이 뭐야? 엄마 이상형.”
“매일 희락이랑 같이 있어주는 엄마요. 어디 가지 않고, 맨날맨날 저랑 같이 있는 엄마.”


매일 같이 있어주는 엄마.


“그거면 돼? 맛있는 것도 못 만들고, 청소도 못하고, 희락이 머리도 예쁘게 못 빗겨주고. 그런 거 하나도 못 해도 상관없어?”
“아! 그거는 우리 아빠가 잘하니깐 괜찮아요!! (강을 보며) 그치 아빠? 아빠가 다 잘하니깐 괜찮지요오~?”
“희락이 엄마 될 사람은 진짜 행복하겠다~ 요렇게 예쁜 딸이랑 뭐든 다 잘하는 남편이랑 같이 사니까.”
“이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랑 같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같이 있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매일.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함께 있는 시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그런데. 이 작은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어쩌면 아이보다도 속이 덜 컸을까.

누군가의 시간에 매일 자신이 걸어 들어가는 일. 아이가 말한 ‘매일 같이 있어주는 엄마’의 의미는, 지치지 않고 꿋꿋하게 서로의 시간에 다가서는 일이란 걸. 서로의 시간을 채워가는 일상이라는 걸. 차희는 뒤늦은 깨달음에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KakaoTalk_20251107_173339220_06.jpg

기운이 쪽 빠진 얼굴로 식탁 앞에 앉은 희락 쪽으로 유부초밥과 문어 모양 소시지가 놓였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두고도 아이는 영 입맛이 없는지 먹는 둥 마는 둥 깨작댈 뿐이었다. 강은 그런 희락을 가만히 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어제, 차희 이모가 왔었어. 꽃집에.”


희락의 시선이 제 아빠를 향했다.


“...언제?”

“너 집에 가고 나서.”


아이가 고개를 푹 떨궜다.


“왜... 못 왔대...?”

“아빠도 몰라. 근데 이모가 희락이한테 직접 말해주고 싶대.”


아이가 다시 고개를 들어 강과 눈을 맞췄다.


“만날래?”


차희를 만날 거냐는 질문에 숟가락으로 밥알을 흩으며 고민하는 희락. 제 아빠한테 말할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환한 얼굴로 웬 남자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얼굴. 그 아저씨는 누구였을까. 분명 이모는 아빠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5분, 10분, 15분... 아이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지만, 강은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골몰히 생각하던 희락이 숟가락을 툭 내려놓았다.


“아빠, 나 이모랑 만나고 싶어.”

KakaoTalk_20251107_173339220_11.jpg

첫차 앞. 차희는 힘 있게 손잡이를 돌렸다. 촤르릉- 드림캐쳐의 맑은 울림이 가게 안에 퍼졌다. 이영은 무감한 눈을 들어 차희를 봤다.


“어서 와요. (눈빛으로 잠깐 차희 얼굴 살핀다) 잠 못 잤어요? 얼굴빛이 안 좋네.”


차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싸장. 나 너무 나쁜 어른이에요.”


이영의 얼굴에 따듯한 미소가 어렸다.


“혹시 희락이 때문에 그래요?”

“네.. 무슨 어른이 아이랑 약속도 하나 못 지키나.. 너무 한심해요.”

“어른이라는 이름이 만능은 아니니까요. 그저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으면 어른 아닌가. 어른이 뭐 그리 거창해야 할까. 어른도 실수는 해요.”


이영의 말에, 차희가 푸스스 웃어 보였다. 왠지 모를 긴장이 풀어져서였다. 그때였다. 차희의 등 뒤에서 촤릉- 드림캐쳐의 울림이 귓전에 맺혔다. 돌아보니 희락이 서 있었다.


“희락아.”


차희의 부름에, 아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차희의 품에 폭 안겼다.

dekler-ph-gdRZSnAnevU-unsplash.jpg

희락의 행동에 놀란 차희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두 팔로 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이모, 왜.. 안 왔어요? 희락이랑 약속 까먹었어요..?”

“아니. 안 까먹었어. 그런데.. 그날 이모 회사에 사고가 생겼어. 그거 때문에 약속을 못 지켰어. 미안해 희락아.”


희락이 차희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빤히 그 얼굴을 들여다봤다.


“정말,이에요?”

“응. 정말이야.”

“아닌데.. 거짓말인데..”


차희가 놀란 얼굴로 희락을 쳐다봤다.


“거짓말이라니..?”

“내가 봤어요.. 이모가 다른 아저씨랑 있는 거.”


희락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꺼졌다.


“다른 아저씨라니..?”


아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희는 답답했지만 희락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잠시간 그 채로 있다가 다시 차희를 응시했다.


“이모한테 갔었어요. 택시 타고요. 이모 놀래켜주구 싶어서. 근데.. 근데...”


희락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이모가.. 다른 아저씨랑 막 웃으면서 나왔어요. 행복해 보였어요..”


그 순간, 차희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쳤다. 문제의 그 남자 고객을 힘들게 설득한 후, 배웅하던 길이었다. 아, 그 모습을 희락이가 봤구나.


“그 아저씨는 이모 회사 손님이었어. 희락이가 오해한 거야.”


아직 의문이 덜 해소된 듯한 아이의 눈빛. 차희는 올곧은 눈으로 희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모, 거짓말 안 해.”


끄덕끄덕. 희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말간 눈으로 말했다.


“이모. 희락이가, 이모 좋아해요.”


차희의 동공이 커졌다. 이렇게 달콤하고 가슴 벅찬 고백이라니.

희락이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왜 좋은지는 모르겠는데요. 그냥요. 그냥 차희이모가 자꾸만 좋아요.”

jorge-fernandez-salas-bUz7tSY7kQs-unsplash.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