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는 게 아니지

- 은강과 희락, 그리고 차희의 이야기 7

by 장해주

강과 희락이 떠난 첫차 안. 방금까지 떠돌던 신비한 공기의 흐름이 천천히 흩어졌다.

차희는 방금까지 자신의 손을 감고 있던 작은 온기를 떠올렸다. 아이의 손이 이렇게나 따듯하고 보드랍구나.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촉이었다. 그 온기가 사라질까 봐, 차희는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그리고 아이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진짜요?? 그러엄~ 내일도 만날래요, 우리?”
“우,리..?”
“(새끼손가락 내민다) 약속해요!”
“그래 약속!”

내일. 꼭. 차희는 다시 한 번 되뇌었다.

그날 밤. 아이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유치원 소풍보다도 더 기다리고 설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있던 희락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방에 불을 환히 켰다. 그리고는 옷장 문을 활짝 열고 걸려 있는 옷들을 골몰히 살피다가 하나씩 꺼내 전신 거울 앞에 대보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애기 같아 보이겠지?”, “너무 평범해...”, “흠... 이것도 별루고.” 어느새 옷장 앞에는 선택 받지 못한 옷가지가 산을 이루었다.

타각타각. 덜컹, 덜그럭. 딸 아이의 방에서 나는 분주한 소리에 강이 발걸음을 옮겼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희락이 옷을 고르는 모습이 보였다.


“딸, 안자고 뭐해? 너 그러다 내일 늦잠 잔다~”


아빠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다는 듯,


“아이 아빠도 차암. 지금 잠이 안 온단 말이야~”


방문 앞에 섰던 강이 문을 조금 더 열고 성큼, 희락의 방으로 들어왔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보며 강은 경탄에 이른 표정을 지었다.


“(으익!) 이게 다 뭐야~ 은희락..!”


아빠의 얼굴을 보며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 희락.


“아빠아~”


이럴 때 희락은 무언가 필요한 게 있다는 뜻이었다. 강은 팔짱을 터억 끼며 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따님이 또 뭐가 필요해서 이러실까아. 이렇게 예쁘게 아빠를 찾으면 뭐가 있다는 건데.”


씨익. 희락이 입꼬리를 올린다.


“아빠아~ 옷 하나 사주면 안 되실까요?”

“옷? 무슨 옷?”


희락이 수줍은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몸을 꼬았다.


“데이트 할 때 입을 옷...”

뭐라...? 데이트라니.


“누구랑 데이ㅌ....”


하다 말문을 닫는 강. 아이가 말하는 데이트 상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윤차희.

“그래. 하나 사자. 안 그래도 우리 딸 요즘 키가 좀 커져서 옷 하나 살 때 됐어.”


와아!! 희락이 방방 뛰기 시작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좋아?”

“응!”


희락이 방긋 표정을 짓더니 손을 위아래로 흔든다. 제 아빠한테 큰 키를 구부려 자신에게 맞춰달라는 뜻이었다. 픽- 강은 부드럽게 웃으며 허리를 굽혀 딸에게 다가갔다. 아이가 강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했다.


“아빠아~ 사랑해. 고마워요.”


세상 이보다 달큰하고 행복한 맛이 또 있을까.

‘딸 키우는 맛’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주말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는 희락. 아빠가 깨우지도 않고 스스로 일어난 적은 처음이었다. 알아서 세수와 양치질을 마친 희락은 곧장 새로 산 원피스까지 입은 상태였다.

주방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며, 강은 딸 아이가 종종종 온 집 안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저리도 좋을까. 하긴. 이제껏 제 또래 여자아이들만 만났을 뿐, 어른 여자와 이런 관계 형성은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아이가 좋아하는 오믈렛을 만든 강이 딸 아이의 방 쪽을 향해 말했다.


“따님! 이제 밥 먹자.”


방 쪽에서 밝은 음성이 돌아왔다.


“응! 잠깐만 아빠아~”


찰랑이는 단발머리에 하얀 머리띠를 얹고 나타난 희락의 모습에 강의 표정이 환해졌다.

“너, 누구 딸이야?”


강의 말에, 희락이 양쪽으로 원피스 자락을 쥐고 살짝 펼치며 숙녀 인사를 했다.

“은희락입니다. 잘 부탁해요.”


인사를 마친 희락이 말갛게 웃었다.

“아빠, 나 어때? 합격이지요오~?”


그 시각. 차희는 빌딩 숲을 걷고 있었다. 아침부터 한 고객으로부터 클레임 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전부터 매칭 결과를 두고 불만을 제기하며 지속적으로 애를 먹이던 남자 고객이었는데 결국 문제가 터져버린 것이다. 전액 환불 조치는 물론, 정신적·시간적 손해배상까지 청구하겠다는 통보였다.

진작에 잘라냈어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두고 보자는 팀장의 말에 시니어 매니저인 그녀가 대신 관리하던 고객이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차희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잰걸음으로 회사 빌딩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간 후부터 차희는 고객 대응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클레임을 건 남자 고객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팀장과 추후 고객 관리에 대한 매뉴얼 논의도 이루어졌다.

바깥 하늘이 어느새 예쁜 노을빛으로 물드는지도 모른 채.

구름 위를 걷듯 가벼운 발걸음은 가라앉고.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연하고 따뜻한 핑크색 프리지아는 어느새 힘을 잃고 축 쳐져 있었다. 그리고 기쁨으로 상기된 얼굴에는 햇살이 지워져 있었다.

희락은 그저 첫차 안에 앉았다가, 밖에서 또 기다리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이영은 말없이 아이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싸장 이모오..”


아이가 힘없이 말을 길게 늘였다. 이영의 무감한 시선에, 곧 울 것 같은 희락의 얼굴이 비쳤다.


“무서워?”


이영의 말에, 희락의 동그란 두 눈에서 또르르- 구슬 같은 맑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이영은 아이 옆으로 가 여린 몸을 가만히 안아 토닥였다.


“희락아. 분명, 약속을 잊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오지 못할 이유가, 있을 거고.”

아이를 어루만지는 목소리에, 희락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아빠한테 연락해줄까?”

“(고개 절레) 아니요.. 제가 갈 수 있어요.”


이영의 품에서 나온 희락이 그렇게 첫차를 빠져나왔다. (첫차와 강의 꽃집 거리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둔, 길건너 상가와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거리이다. 아이 걸음으로는 5분 정도.)

강의 꽃집으로 터벅터벅 걷던 희락의 눈에 지나는 택시가 보였다. 순간, 희락의 두 눈이 반짝였다.

택시를 향해 손을 든 아이가 자신의 앞에 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아저씨. 저기.. 여기로 좀 가주세요.”


집을 나서기 전. 희락은 강의 재킷 주머니 안에서 차희의 명함을 꺼내 제 가방에 넣어두었다. 그것을 기사에게 내민 것.

“아가야. 너 혼자니? 아빠나 엄마는?”


희락의 동공이 떨렸다. 그렇지만 씩씩하게 제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보이며,

“저, 돈 있어요. 엄마 회사에 가는 거예요.”


기사는 희락이 내민 명함을 집어 들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택시가 멈춰 선 곳은, 화려한 빌딩 앞이었다. 희락이 손에 든 프리지아를 품에 꼭 안아 쥐며 막 걸음을 뗄 때였다.

아이의 눈에, 차희가 비쳤다. 옆에 선 남자와 다정히 웃으며 빌딩을 나오는. 그립도록 기다리던 그 얼굴이.

아이의 눈에 생기가 꺼졌다. 강은 제 품으로 달려와 흐느끼는 딸을 그저 안아서 말없이 등을 쓸어줄 뿐이었다. 물어도 아이는 답을 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강은 희락의 모습을 보며 상황을 대충 예상했다. 윤차희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는 실망했다. 웬만해선 울지 않는 아이가 이토록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상황. 약속이 깨진 것보다, 기다림에 대한 실망일 것이었다. 약속에 대한 어떤 언질이라도 있었다면. 아이는 분명 이해할 거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일방적이라는 의미였다.

한참을 제 품에서 울던 희락은 차차 안정되더니 자고 싶다고 했다. 강은 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지금 희락이 좀 데리고 가 주실 수 있으세요?“


잠시 후. 우느라 온 힘을 다 뺀 희락은 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헐레벌떡 한 여자가 꽃집에 뛰어들었다. 윤차희였다.


“(숨 몰아쉬며) 희, 희락이는..요”


차희의 말이 끝났을 때, 강의 차가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는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