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러면 곤란한데

- 은강과 희락, 그리고 차희의 이야기 10

by 장해주

빨려 들어갈 듯 깊은 눈동자에 차희는 호흡하는 것을 잊었다. 그때 강의 달큰한 숨결이 그녀의 코끝에 내려앉았다. 강의 숨결에 짧은 숨을 몰아쉬는 차희.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좋아해요?”


픽- 강이 웃었다. 강의 입꼬리로 옅은 미소가 걸리는 모습을 본 차희가 충동적으로 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뗐다. 강의 동공이 흔들렸다.


“난 당신 좋은데. 나, 좋아해요?”


강이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차희의 한쪽 볼을 감쌌다.


“이러면 곤란한데. 나 혈기 왕성한 남잡니다.”


차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차희의 짧은 입맞춤은, 사실 34살의 젊은 남녀에게서 오갈 수 있는 담백한 스킨십이었지만. 어쩐지 강의 묵직한 음성은 정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차희가 감정을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혈기 왕성한 은강 씨, 그래서 말이에요. 나 좋아ㅎ...”


차희는 문장을 끝을 맺을 수 없었다. 은강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덮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 멍하니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차희. 조금 전 그와의 키스가 생각났다. 천천히 제 입술을 매만지는 차희.

진도가 너무 빠른가 싶다가도, 먼저 들이댄 건 자신이었기에. 하긴, 서른을 훌쩍 넘긴 성인남녀가 키스 한 번 한 걸로 무슨 진도씩이나. 유치하기는.. 하다가 잠깐. 유치해서 뭐? 사랑하면 다 유치해지는 거라던데. 어머머. 미쳤나봐. 사랑? 언제봤다고 벌써 사랑이야. 차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얼굴에 피어오르는 웃음은 숨기지 못하는 그녀였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차희. 연락을 먼저 할까, 말까. 이내 결심을 한듯 결연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다. 목마른 놈이 먼저 우물을 파는 거랬지. 핸드폰 화면을 열고 메시지창을 띄우는 차희.


[잘 들어갔어요? 오늘부터 우리 1일...]


쓰다가 ‘도도도도’ 지운다.


“오늘부터 1일이 뭐냐... 진짜 유치하게.”


다시 텍스트를 입력하는데.


[은강 씨, 이제 바람 피우는 건 안 됩..]


쓰다가 다시 ‘도도도도’ 지운다.


“벌써부터 구속한다고 지겨워하면 어쩌려고 이래...”


하아.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무슨 메시지 하나 쓰는 게 이렇게 어렵담.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마구 이불킥을 해대는 차희.

그때였다. 띠링. 핸드폰에서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이불 속에서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무르기 없기, 입니다.]


은강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지 5분. 아직 차희에게서 답이 없다. 힐끔힐끔.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강은 수시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강은 핸드폰 화면을 열고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무르기 없기라니. 잘 들어갔냐는 말도 없이 대뜸. 후우. 긴 숨을 몰아쉬는 강이었다.

아무래도 연애가 너무 오랜만이었다. 여자 사람을 ‘여자’로 대하는 것도. 지금껏 아이 아빠로만 살았지, 남자로 산 세월이 까마득했으므로.

거실 소파에 앉아 좌불안석인 제 아빠를 말간 눈으로 지켜보던 희락.


“아빠. 똥 마려워?”


또..똥? 강이 희락을 보며 자조 섞인 픽. 아무래도 제 딸의 눈에, 아빠의 지금 모습이 똥 마려운 강아지 정도로 보이나 보다.

참내. 연락 좀 늦는다고 이렇게 성마른 감정이 나오는 건가. 새삼 윤차희라는 존재가 대단하다 싶다. 순식간에 자신의 마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존재가 됐다니. 감정 하나는 제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어른인 줄 알았는데. 남녀상열지사 앞에서는 아무래도 무용지물인 건가보다.

이러면 정말 곤란한데. 온갖 잡념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였다. 강의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다. 훅- 강은 숨을 세게 한번 몰아쉰 후 핸드폰 화면을 열고 확인했다. 윤차희였다.


[결혼할래요?]


무르기 없다는 말에 결혼이라는 답이 맞는 건가. 강은 메시지 내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여자는 뭐 이리 대책 없이 돌진만 할 줄 안단 말인가. 결혼이라니.

강은 통화버튼을 길게 눌렀다.

핸드폰 화면에 ‘은강’ 두 글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놀란 눈을 끔뻑이다가 전화를 받는 차희.


“여, 보세요?”


“윤차희 씨.”


강의 묵직한 음성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차희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왜..요.”


“결혼하자는 말, 진심입니까.”


“그, 그럼 결혼하잔 말을 가짜로도 해요? 우리 키스도 했거든요!!”


하하하하. 강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왜 웃어요?”


“원래 이렇게 불도저에요?”


“불도저라뇨? 무르기 없기. 이렇게 못 박은 사람은 은강 씨에요.”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왜요? 연애는 괜찮은데, 막상 결혼하자니까 도망가고 싶어요?”


두 사람 간 대화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침묵을 깬 건 은강이었다.


“윤차희 씨. 나한테도 기회라는 걸 좀 주죠. 혼자 이렇게 다 해버리고 나면, 나는 대체 윤차희 씨한테 뭘 해줘야 합니까.”


차희의 얼굴에 놀람과 동시에 수줍음이 피어올랐다.


“뭘, 해주고 싶었는데요?”


“연애, 고백, 프러포즈.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