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모르는 여자

by 장해주

"나 이번 썸도 망한 거 같아."

밤 늦은 시간. 핸드폰 전파를 타고 흘러나온 친구의 목소리엔 어떤 씁쓸함보단, '망한 썸'에 대한 자조가 섞여있었다. '이번에는'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시간이 '역시나' 밖엔 안 되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한 달이라는 시간과 감정과 금전과 그 어떤 에너지들을 쏟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올해로 어느덧 서른 일곱. 요즘 결혼적령기는 갈수록 늦어지고 느지막이 결혼을 해서 늦은 출산이 대세라고 하지만, 그래서 주변인들이 하나둘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간대도 조급해하지 않고 겉으론 쿨내도 좀 풍겨가며 짐짓 여유도 챙기는 척을 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남의 결혼식만 돌아다니는 나를 순간 돌아볼 때면 한숨 비슷한 것이 나오기도, 남들은 잘만한다는 그 결혼이 내겐 왜 이리도 어렵고 고달프고 힘든 건지, 싶어 뭔지 모를 회의감 비스무리한 감정 따위가 후욱 하고 명치께를 치받아 아픈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 소개팅을 해주어 만난 상대들도 어쩌면 하나 같이 나와 잘 맞지 않고 또 인연이란 건 또 뭐 이렇게 피곤스러운 건지. 내 마음에 드는 상대는 꼭 뭔가가 딱 떨어지는 맛이 없어 그저 그렇게 관계가 끝나버리고, 또 나를 죽자고 마음에 들어하는 상대는 어쩐지 내 마음이 썩 향하질 않고.

소개팅 주선자로부터 "좀 어때?"라는 질문에 뭐라 대답할지 몰라 머뭇대다 어렵사리 "나는 좀 아닌 것 같아."라고 말을 꺼내놓으면 한두 번 봐서는 모른다, 좀 더 만나봐라, 걔가 이런 게 괜찮고 저런 게 괜찮고... 훈수 늘어놓는 소리를 계속 듣다 결국 진이 빠지고 기가 쭈욱하고 빨려버린다.

그러고 끊어진 핸드폰에 대고는 소개팅 주선자는 듣지도 알지도 못할 말로, "그렇게 장점 많고 좋은 상대면 네가 만나던가..." 라는 짧은 말로 꾸욱 눌러놓았던 가슴 속 깊은 말을 툭 하고 뱉어놓는다.

그러다 내가 그동안 만났던 남자친구들을 떠올려본다. 대단히 많았던 연애사는 아니지만 소개팅이 어그러지고 관계의 치임이 오는 이런 상황이면 대체 뭐가 문제인지 나는 지난 연애를 습관처럼 되짚어보게 된다.


걔랑은 그렇게 좋았는데 왜 헤어졌더라, 얘는 처음에 어떻게 만났었지?, 나 없인 못산다던 그놈은 지금도 잘만 살고 있고... 같은 무쓸모 무가치의 생각들. 그러다 알게 된 건 한숨을 부르는 나의 연애 패턴이었다.

내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주변 사람들이 종종 물어오는 건, "너는 남친이랑 데이트 할 때 뭐하면서 하니?"였다. 이럴 때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면서 한다는 말이, "가끔 영화도 보고 밥 먹고 드라이브도 가고..." 같은 평범함을 가장한 어떤 대꾸를 하곤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리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남자친구를 만난 시간이 대략 2-3년은 되었는데 그간 나는 어떤 데이트를 했더라, 같은.


그동안 만난 남자친구들을 차분히 떠올려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남친들과 제대로 된 데이트를, 그러니까 그런 연애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사랑에는 그 자리 언저리마다 주고받은 향기가 나기 마련이건만, 내겐 그런 게 없었다.
맨날 만나면 술만 먹고 여행 한 번 간 적이 없다. 데이트 뭐 별 거 있나, 싶지만 이건 연애다운 연애를 할 줄 몰라서였다. 알콩달콩 깨 볶아먹는 방법을 모르는 거였다.

만날 당시에야 서로 죽고 못살아 만났다지만 어떻게 헤어지고 나서 늘 드는 생각은 아픔보다도 이 지난하고 지긋지긋한 상대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정말 잘 헤어졌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왔던 것이다. 물론 좋아 만난 상대가 한순간에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돌아간 것과 그 어떤 감정적인 것들이 채 정리되지 않아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시간이 한두 달 쯤 지나고 나면 사뭇 괜찮아졌다. 정말 시간이 약이구나 싶기도 하고.

내 연애는 순차적으로 상대만 바뀌었을 뿐, 그 어떤 방식과 패턴은 계속 그 자리였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연애를 모르는 여자'였다.


불 같이 활활 타오르고 그저 같이 붙어만 있으면 다 되는 연애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연애 바보. 누군가 나를 그저 사랑한다는 그 꼬맹이 사탕발림 같은 말에 곧잘 속아넘어가는 쉬운 상대. 겉으로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한다지만 늘 애정결핍에 몸부림 치며 끊임없이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드는 자존감 바닥.

너무 자기 비약이 심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걸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간의 나는 정말 '그랬었'으니까.

그런데 참. 한번 잘못 길들여진 패턴은 여간해서 바뀌지가 않는다. 아주 치명적인 중독성 같은 거라고 해야할까. 이번 연애에서는 뭔가 내가 다 해줘서 손해를 본 것만 같고 밀당 같은 것도 없이 내 쪽에서 너무 마음을 퍼주기만 해서 사랑의 약자가 된 것만 같고. 그래서 결국은 사랑에 목말라,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전전긍긍하고 애태우며 보낸 시간들이 떠올라 이런 내가 또 그렇게나 꼴보기가 싫고 지긋지긋해서 한탄을 하다가. 그리고는 몇 번이고 '다음번에는 절대 이런 짓거리는 하지 않으리.' 자기 최면도 걸어가며 굳은 결심을 해본다.

그러고 시간이 지나 그 지난한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 무렵 지난 연애에서 진저리치며 다짐했던 결심을 다시 꺼내어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고. 그러나 그러면 무얼하리. 이런 것도 얼마 후면 모두가 물거품처럼 사그라지고야 만다.

나는 기어이 지난 연애와 또 똑같은 길을 걷고야 마니까.


그렇게 또 끝난 연애에서 그 모든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자기 합리화를 펼쳐나간다. 그는 나와 맞지 않는 상대, 정말 잘 헤어졌다, 그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와 같은.

하지만 정말 지긋지긋한 건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과의 연애가 아니었다. 그 모든 과정을 도돌이표 마냥 되돌리고 또 되돌리는 나. 근본적인 문제는 '나'였다.


나는 정말이지 연애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연애의 의미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지도.

그저 사랑하면 사랑한다, 고마우면 고맙다, 미안하면 미안하다와 같은 표현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란 걸. 늘상 보고싶어 죽겠는 마음만 부여잡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란 걸. 사랑만 있다고 그 사랑에 취해서만 되는 것도 아니란 걸. 사랑한다는 말 자체를 곱씹고 또 곱씹어 보아야한다는 걸. 사랑은, 그리고 연애는 그렇게나 어려운 거라는 걸.

연애도 어렵고 사랑도 어렵다. 연애를 뭐 그리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연애는 그런 것이라고.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상대한테보다 더 쉽게 마음이 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쉽게 배신감을 느낀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 더 욕심이 생긴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받고 싶어진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남자를 사귀어만 봤을 뿐, '진짜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진짜 연애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그 과정은 따뜻할 것이고 그 과정은 평온할 것이고 그 과정은 때때로 찬바람도 불 테지만 쉽게 쓰러지거나 뿌리째 뽑혀 넘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사랑을 믿고 있다. 사랑은 아직, 믿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


언젠가 내게 다가올 그 사랑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리고 잔잔한 그날들을 위하여,

세레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