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의 사랑법

by 장해주

2021년 1월 20일 목요일. 날씨와 시간 (비 내리는 오후)

요즘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그렇다보니 밀린 드라마며 예능 프로그램이며 등.. 영상을 보는 시간이 늘어가는 하루하루다. 일 때문에도 보고, 말 할 상대가 없어서도 보고, 원고가 안 풀려 답답할 때도 보고.

그렇게 보고.. 보고.. 또 보고를 하다가..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를 보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에서 인상 깊게 본 인물은 큰 딸 은주. 겉보기에 차갑고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누구보다 속정 깊은 그 캐릭터. 표현하는 것보다 지나가는 표정 하나, 툭 던지는 말 한마디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캐릭터.

다른 듯.. 어쩐지 좀 닮은 것도 같았다. 나랑.

은주랑 내가 닮았다는 지점에서, 주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이 차갑고 냉소적인 영역은 어찌보면 엄마나 가족에게만 보여지고 해당되는 사항이기에.

극중, 이런 장면이 나온다.

허리를 다친 아빠를 대신해 은주는 대학시절 7년 동안 집안의 가장 역할을 대신했다. 꽃 같은 그 시절 그 나이. 과외와 알바로 청춘을 보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은주도 결혼을 하고 어느 날. 아빠가 은주에게 통장 하나를 내민다. 은주가 7년 동안 자신의 자리를 대신한 청춘의 값이라며. 고맙다고.

은주는 그 통장을 들고 곧장 자신의 엄마에게 가서 통장을 내밀고는,

"엄만 왜 나한테 고맙다고 안 해?" 라고 따져 묻는다.

그리고 그런 은주를 보며 그 엄마가 하는 말..

"세월이 얼만데. 그깟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네 7년을 갚아. 그걸 어떻게 대신해.." 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장면.

이 대목에서 나도 울컥-하고 뭔가 속에서 뜨끈한 게 한움큼 올라왔다.

그랬다. 나도 그랬다. 나 역시.. 그랬었다.

내가 내 엄마한테 하고 싶었던 말.. "엄마. 엄만 왜 나한테 고맙다고 안 해?"

몇 년 전. 바로 밑의 남동생이 큰 사고를 당해 내가 대출을 받아 해결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6년. 그 빚을 갚느라 아등바등.. 먹을 거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 가며. 프로그램 하나라도 더 해서 빚 갚기에 바빴다. 빚 갚는데 나의 온 청춘을 갈아넣은 시간들.

그렇게 7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고맙단 말 같은 건 들어보지 못했다. 엄마로부터.

그리고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 엄마는 왜 내게, 이 모든 시간들을 지나는 동안 고맙다고, 내 딸 힘들었겠다고, 수고했다고, 이 말 한 마디를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너무나 당연해서였는지, 혹은 드라마 속 은주의 엄마처럼 그런 속깊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그러나. 엄마의 마음이 어느 쪽이건, 나는 쉽사리 물을 수가 없었다. 서운할 때도 있었고 답답할 때도 있었고 어느 땐 화가 나서 퍼붓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물음을 던진 그 순간, 적당한 대꾸를 못해 찾아 헤맬 엄마 얼굴이 떠올랐고 어쩌면 당황해서 언성을 높이거나 한바탕 눈물로 오열할 엄마도 그곳에 있었다. 물론 내 생각들이지만, 엄마는 십중팔구 울게 될 것이었다.

해준 것 없는 엄마라서, 라며.


대답을 못하는 것보다, 역시나 자신은 내 딸에게 어쩌면 죽을 때까지 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해준 것 없는 엄마로 각인 시키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가 스스로를 가두고 죄책감으로 얼룩지게 만들 자신이, 내겐 없었다.

그건 정말로 엄마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돼버리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두 번 다시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지인과의 대화에서 이 질문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주제로 수다꽃이 왕성했던 날이었다. 나의 두 지인은 슬하에 이미 자녀를 둘씩 둔, 50대의 엄마들이다. 한창 부모는 이래, 자식은 저래...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였다.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나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 엄만 대체 어떤 마음이겠냐고.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때에는 위에 어른들이나 또 내 엄마들한테 그런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어.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라고. 막 겉으로 쭉쭉 물고 빨고 그러지 말라고. 속으로 깊이깊이 사랑해주라고."

속으로 깊이깊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숨바꼭질 놀이도 아니고, 꽁꽁 싸매둔 그 마음을 무슨 수로 알 수 있다는 걸까.

그 혼란스러움을 눈치 챘는지, 지인이 옅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이해가 안 가. 그걸 무슨 수로 알어. 그치? 그게 참 잘 된 방법은 아니야~. 잘못된 거야. 표현을 해야 알지."

지인과의 대화 속에서 뭔가 띵- 하고 누군가 내 귀에다 커다란 종을 바싹 대고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의 대화들을 가만히 떠올리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엄만, 엄마만의 방법으로 사랑법을 펼친다고. 그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엄마의 그 사랑들이 뜨끈하게 피어올랐음으로.


어느 날에는 "딸 홈쇼핑에 앵클부츠가 엄청 예쁘네. 무슨 색깔이 좋아?"

며칠 후에는 "딸내미 엄청 추워. 엄마가 롱패딩 하나 샀어. 너 주려고. 서울은 더 춥잖아. 감기 걸리지 않게 아끼지 말고 막 입고 다녀. 알았지? 엄마가 또 사줄게."

여름, 겨울 이사하던 날에는 "이불 세트 보냈어~. 이번에 가서 보니까 이불에 막 보풀이 일어서 보기 싫더라. 깨끗한 걸로 뽀송뽀송하게 덮고 푹 좀 자. 맨날 잠이 모자라서 어째..."

고맙다는 말 아니더라도, 미안하다는 말 아니더라도, 엄마는 엄마만의 방법으로 내게 말을 걸고 마음을 전해오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사랑을 오히려 '당연'하게 대하고 있던 건 어쩌면 나였을지도.


세대가 바뀌어 제 자식이 최고이고 으뜸이라며 표현 충만한 엄마들에 비해 내 엄만 여전히 그런 표현은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런 게 아니어도 속으로 깊이깊이 자식을 사랑하는 내 엄마의 마음을 알았으니까.

엄마만의. 그 나름의 사랑법을.

(물론 다른 엄마들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어느 가정이나, 엄마나 표현 방법이 다르다는 걸 말해두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먼저 고맙다고. 먼저 미안하다고.

그런 도전을 해보려고 한다.



엄마. 저기 있잖아.

우리 고마운 건 고맙다고, 미안한 건 미안하다고, 그런 말은 좀 하고 살자. (앞으로 내가 먼저 표현은 하겠지만)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이런 표현들을 평소에 안하고 사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엄마랑 나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타이밍을 놓쳐서

결국은 서로의 사랑을 오해하고 화를 내고... 상처를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빌런이 되는 그런 시간들이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엄마. 내 말은...


오해해서 미안해.

사랑해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나도 엄마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