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원고 작업으로 한창일 때였다. 핸드폰 진동이 지잉- 지잉- 울린다. 발신자 [다 섞인 사이]
피식, 웃으면서 전화를 받으니 27년지기 친구다.
"안 잤어?"
"아직. 잘 시간 아니야~."
"또 글 쓴다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구나?"
"그렇지 뭐. 너는"
"나.. 공부 하고 들어가는 중."
친구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공부 때문인가.. 친구는 1년 전부터 매일 12시간 이상 인터넷 강의와 독서실을 오가며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기운 빠진 목소리는 어쩐지.. 단순히 공부 때문만은 아닌 듯 느껴졌다.
"뭐야. 무슨 일인데."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채는 신공에, 친구는 휴우- 한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엄마가.."라며 운을 뗐다.
지금 하고 있는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도 엄마의 소원이었다며, 그런데 정작 엄마는 자신을 봐주기보다 남동생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고 있는 것만 같다며, 어떨 때는 내가 딸인지 뭔지 헷갈린다며, 그리고 오늘은 아침부터 엄마가 속을 박박 긁어놓는 통에 하루종일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는 말.
친구의 말의 요지는 그랬다. 사실 원해서 시작한 공부도 아니었고, 살면서 엄마 속도 되게 썩이고 그랬으니 그 소원 한 번 들어주자.. 싶어 갸륵한 마음으로 도전한 거였다고. 응원까진 아니어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만 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친구의 이야기를 20여분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야. 그냥 네 마인드를 바꿔야 돼. 엄마들은 안 바뀌어. 나는 안 그런 줄 아냐. 시시 때때로 우리 엄마 내 속 뒤집어 놓는데, 그거 일일이 스트레스 받고 싸우고 신경 쓰면 나, 작가 못해~."
"나도 알지. 근데 그게 맘처럼 되냐? 저번에는 엄마 가게 놀러오는 단골손님 딸은 뭐가 어쩌고 저쩌고... 나 진짜 미쳐버리겠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러게. 엄마들은 참 이상해. 어떤 집 자식들이 뭘 해줬네, 또 누가 뭐가 됐네, 이런 얘길 막 하잖아. 근데, 나는 그럴 때 있어. 어떤 친구가 이번에 부모님이 뭘 사줬네, 뭘 해줬네... 그게 되게 부러울 때가 있다?"
친구는 '폭풍공감'이라고 했다. 자신은 엄마의 마음을 채워줄 수가 없는 존재처럼 여겨진다며.
사실 자식들도 다른 집 부모들과 내 부모를, 비교하지 못해서가 아닌데.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나의 시선이지만, '다 섞인 사이'의 그 친구도, 나도. 각자의 엄마에게 참 괜찮은 딸인 것만 같은데.
뭐가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진 걸까. 아니면 그냥 이런 마음들이 오고 가는 것은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건지.
언젠가 나는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들은 왜 자식 자랑을 누구 앞에서 못해서 안달이 난 거냐고. 그런 거 좀 안 하면 안 되는 거냐고.
내 말에 엄만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도 이 나이쯤 돼 보면 알 거라고. 지금 세대 엄마들이야 세상이 좋아져서 이런 거 저런 거 할 것도 많고 볼 것도 많고 다닐 것도 많고 그렇겠지만. 그래서 자식의 인생보다 자신의 삶을 다듬고 꾸릴 시간도 많아 온통 제 인생 이야기 할 게 많겠지만. 나 같은 세대 엄마들은 아니라고. 자랑 한 푼어치 할 것 없는 인생에 자식 자랑, 남편 자랑 이런 것도 없으면 무슨 낙에 이 긴긴 세월을 버티며 살겠냐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그래서, 엄만 내 자랑 뭐하는데?"
엄마가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내 딸 작가라고.
엄마의 그 말에 나는 황당해서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작가... 그럼 그거 빼고는? 작가 아닌 건 자랑할 게 없는 건가, 싶어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내 엄마가 딱히 이래서 좋고, 저래서 싫고. 이런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말이 좀 센 사람이라 처음 누군가에게 소개 시킬 땐 약간의 긴장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특별히 그게 싫거나 대단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부분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사랑하니까. 나는 엄마가 내 엄마인게 그냥 좋은 거니까.
세상 시선 신경 쓰지 말고.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것에 최고라며 자랑을 해도. 엄마는 거기에 휩쓸리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지금 시대가 그렇고, 나이를 먹어서 그렇고, 살아온 방식이 달라서 그런 거라는 엄마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엄마한테는 누가 봐도 세상 남부러울 것 없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으니까.
다만.
엄마도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 좀 좋아해주고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특별히 자랑할 게 많은 딸이어서, 대단히 쓸모가 많은 딸이어서 그런 거 말고.
그냥, 내 딸이기 때문에. 누구랑 비교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가끔은 좀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어떤 날은 되게 속상하기도 하니까.)
누군가 엄마에게 "우리 딸은 이래~." 라며 은근한 자랑을 해 올 때,
우리 엄마는...
나는 내 딸이 그냥 좋아. 왜냐면 내 딸이니까. 이희정 딸이니까. 내 딸은 그래서 후지지 않아 절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주는 엄마이길. 그냥 내 딸이어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난다고 말해주는 그런 엄마이길 바란다.
나는 엄마가, 그냥 내 엄마여서 좋으니까. 음식을 잘해서. 누군가에게 잘 베풀어서. 가식 떠는 성격이 아니어서. 이런 게 아니니까.
그냥 엄마가 장해주 엄마여서 좋은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사랑 받는 딸이길.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