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쁜 딸은 없다

-나는 악역을 하기로 했다

by 장해주

주변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칭찬 중 하나는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임감이란 건, 이따금씩 내게 아주 성가실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손꼽히는 장점이, 내 자신에게는 어쩐지 스스로를 가두고 채찍질을 하게 되는 그런 단점이 돼버리니까.

가끔은 그럴 때가 있다. 나도 온전히 그냥 딸이고만 싶을 때. 투정부리고 싶을 때. 나의 외로움을 오롯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 그런데 이런 건 꼭 나를 제일 잘 알고 들어줄 것 같은 사람한테 하고 싶다. 남 말고. 그런 상대가 내겐 엄마다. 그런데 정작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떤 드라마에서 대학생 딸이 자신의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엄마가 날 지켜야지! 엄만 왜 만날 내 뒤에 숨어?"


그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내 엄마가 생각나서.

우리 엄마가 내 뒤로 숨는 버릇 중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뒤로 숨는 습관이 하나 있다. 자식들에게, 특히 남동생들에게 곤란한 말을 해야 할 때라거나 어렵고 힘든 말을 꺼내야 할 때.


"딸아, 네가 좀 말해봐. 네 말은 듣잖아."


그런데 나는 안다. 엄마가 고작 '그렇고 그런' 이유 때문에 내게 엄마의 자리를 선뜻 밀어놓는 게 아니란 걸. 단지 자식들에게 거절 당하거나 엄마가 잘못됐다는 말을 듣는 게 무섭고 두려워서 그런다는 걸.

그래서 나는 엄마의 이런 습관이 나올 때마다 그 자리를 정중히 거절하곤 한다.


"엄마. 아니 내가 애들한테 누나지 엄마는 아니잖아. 엄마가 해야 할 건 엄마가 해. 나한테 다 떠넘기지 말고."


내가 이런 태도를 보이면 살짝 실망한 듯한 엄마의 다음 반응은 이렇다.

머리가 다 큰 놈들이라 이제 엄마 말은 듣지도 않는다고. 뭐라고 하면 다 잔소리로만 여겨서 무슨 말을 하기가 겁이 난다고.


"엄마. 엄마 말도 안 듣는 애들이 누나 말을 듣는다는 논리가... 뭐가 안 맞잖아. 엄청 이상해, 지금."


이쯤하고 나면 엄마도 별 수 없다는 듯 "알겠다"며 일단락을 한다.

언젠가부터 엄마의 역할을 내가 하고 있다는 느낌. 그게 엄청나게 부단히 애를 쓰는 자리라 힘들고 어렵고 버거웠지만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내 생각을 지배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음으로.

그동안 고생만 하고 산 내 엄마인데. 다 커서까지 엄마가 신경 쓰고 속 썩을 일은 만들지 말자고. 그렇고 저런 안 좋은 소식 들어봤자 걱정밖에 더 하겠나, 싶은 것들.

그런데 이것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걸,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엄마는 내 엄마고 동생들의 엄마고. 그래서 부모 자식 간에는 못할 말도 털어내놓지 못할 속내 따위는 없다는 걸. 엄마가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있게 자리를 줘야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 역할을 내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들한테 무언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혹은 속상한 일이 있어서 들어줘야 할 때, 또는 집안의 크고 작은 어떤 상황들 앞에서. 엄마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그 모든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엄마가 아니었다. 나였다.

그렇게 살았다. 그 무수한 세월 속에 엄마도 나도, 각자의 역할은 잊어버린 채 서로의 자리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마땅히, 당연히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괴리감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그 책임감에서, 엄마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그런 건 이제 그만 하고 싶다고, 내 마음이 외치기 시작했다. 엄마 같은 딸이 아닌 그냥 딸로, 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그래서다. 내가 악역을 하기로 자처한 것은.

생각해보면 그랬다.

내가 엄마의 자리와 역할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됐다는 결론. 처음부터 마음을 흐리는 생각 따위에 잠식되지 않았더라면. 엄마와 나의 관계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이상한 형상을 띠지 않았을 거라고.

물론 내 자신을 탓하는 문제라거나 그래서 내 엄마가 무능한 엄마라는 게 아니다. 절대.

단지 서로가 몰랐을 뿐이고, 그 몰랐던 부분을 정답이라고 착각해 헤맸을 뿐이고, 그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찾아가는 중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왔던 패턴과 방식을 한꺼번에 바꾼다는 건 사실 참 어려운 일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그랬다. 내가 악역을 하는 것. 좀 냉정하고 차가운 딸이 되는 것.

이 방법이야말로 그릇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가장 효과 좋은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들을 그저 지켜보는 일. 봐도 못 본 척 하기, 들어도 못 들은 척 하기, 말하고 싶은 것들도 꾸욱 삼키고 묵묵히 입을 다물기.

엄마도, 나도... 서로의 자리를 찾기 위한 극단의 선택. 내가 품었던 엄마의 마음을 그대로 엄마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내 말 한 마디, 한 번의 손길이면 해결되는 문제들을 그저 내버려두고 지켜보는 일은, 오히려 더 힘에 겹다.

하지만 그때마다 두 눈을 그냥 감고 참아내기로 굳게 마음을 먹는다. 엄마와 내겐 꼭 필요한 시간들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참 효과 빠른 명약이 된다. 물론 이 지름길을 선택했을 때 단단한 각오 같은 게 필요하기는 하다만. 예를 들어 엄마한테 아픈 쓴 소리를 들어야 하며 잦은 트러블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괜찮다. 잠깐의 고통을 바꿔 사는 내내 엄마와 내가 더 행복해질 테니까. 이 모든 과정이 헛되지 않다는 게 마침내 결과로 여실히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란. (그렇다고 고통을 굉장히 즐기는 류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필요 이상의 고통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산처럼 커보이기만 했던 엄마가 이젠 나보다 키도 작아지고, 몸도 줄어들고. 짠한 마음에 먹었던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더 다부지게 내 마음을 다잡아본다.


엄마, 있잖아.

내가 좀 못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말야.

완전 나쁜 딸이라서, 그리고 엄마를 괴롭히려고,

또는 내가 엄마 편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냥, 엄마랑 조금만 더. 아주아주 조금만 더.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야.

우리가 서로를 놓친 그 시간만큼,

우리가 서로를 밀어냈던 그 세월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조금만 더.

이게 욕심이라도 좋아. 나는 꼭 그럴 거니까.

반드시 엄마랑 더 행복해지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나를,

엄마 딸을, 조금만 더 믿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