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년은 도둑년이다

by 장해주

"우리 유여사, 밖인 거 같네? 어디 나가셨어?"


수화음 저편으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온다.


"응. 할머니 남대문 시장 왔어."


남대문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이유는 간단했다. 엄마가 부탁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빠, 엄마가 사는 시골에서는 물건 하나를 사려면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 엄마, 모레 올라온다는데. 아빠 줄 갈비탕도 좀 사다 얼려달라 그러고 과수원 밭일 할 때 입을 편한 바지도 필요하대고."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귀찮음보다 어쩐지 싱글벙글 흥이 묻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지인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딸년은 도둑년이다, 라는 말.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의아했다. 딸이 어째서 도둑이란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갔으니 말이다. 멀뚱히 그런 지인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자신은 결혼하고 지금까지 김치 한 번 담근 적 없고, 친정집에 가서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친정 식구들은 이미 뒷전, 깡그리 긁어다 제 집 냉장고를 채우기 바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 이거 해줘. 엄마 저거 해줘." 전화로 요구사항을 읊어댄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서도 엄마 것을 더 가져가지 못해 안달이 났으니, 딸년은 도둑년이 맞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그런 것 같기도.

시골집에 내려가면 엄마의 냉장고며, 엄마가 귀하게 고이고이 아껴둔 얼마 안 남은 고추장이며 장아찌며...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오지 않던가. 이게 끝이라면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다만, 엄마의 화장대가 아직 남았다. 홈쇼핑에서 엄마가 주문한 팩이며 크림 등... "딸내미 이거 하나 너 써." 말 떨어짐과 동시에 손을 뻗는 모양이라니. 입술로는 "엄마 써. 나 괜찮아." 하지만 몸의 반응은 언제나 말보다 빠르다.

냉큼 화장품을 집어 내 가방에 쏘옥 넣는 약삭빠름.

사실 딸이 엄마에게 도둑이라는 건, 어쩌면 아주 먼 옛날부터 그랬던 것 아닐까. 내가 엄마의 뱃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이미 엄마의 모든 것을 조금씩 훔치고 있었으니까. 하나뿐인 엄마의 몸에 자리를 잡고 양분도, 피도, 산소도... 다 나누어 가지며 그렇게 열 달이라는 시간을 그 속에서 자랐으니까.

그 시간을 지나 열 달 후에는 세상에 나를 내보내려는 엄마와, 그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내가, 해산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함께 겪으며 전우애를 만들기도 한다.

나를 키우며, 엄마는 내가 아니면 몰라도 좋았을 그 모든 일들을 겪었고 엄마의 모든 것을 내게 나누어주어야만 했다.

엄마라는 이름이 생겼기 때문에.


그런데.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딸과 소통이 되는 시점부터, 엄마가 반격을 시작한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주던 엄마가 이제 딸이라는 이름을 가진 상대에게 무한정 자신을 받아달라며 요구하기도 하고, 그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으름장을 놓거나 온갖 적의를 다 드러내기도 한다. 그 적의가 끝내는 깊은 상처로 남을 만큼의 위력을 발휘해 어떤 날에는 나의 존재의 가치를 잠시 잃을 때도 있다.


서로 애틋해죽고, 사랑스러워 죽고, 보기만해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야 할 '이 관계'가 어그러지고 깨져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크게 싸운 어떤 날에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몇 날 며칠씩, 심하면 몇 달씩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 날도 있고. 30분 전까지만 해도 세상 자애로운 엄마, 효녀 딸이었던 사이었다가도 작은 말 하나 때문에 서로에게 꼴도 보기 싫은 존재가 되기도 하고.

세상 가장 친하고 끈끈한 사이에서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전락해버리는 이상하고 오묘한 현상.

물론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 금세 회복이 되기도 하지만.

딸이 커 갈수록, 반대로 엄마의 나이는 점점 들어갈수록, 우리는 어쩐지 서로에게 점점 트러블메이커가 돼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런 관계를 버티다못한 딸 쪽에서 도둑을 하기로 결정한 걸지도.

딸이 엄마의 도둑이 된다는 것.

어쩌면 엄마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은 걸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가 보낸 시간을 잊지 말라고. 내내 기억해달라고. 엄마가 내게 주었던 그 사랑을 저버리지 말라고.


나를, 사랑해달라고.

아주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