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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제 Aug 28. 2020

오빠, 오늘 사진 한 장 꼭 찍어와.

안 그럼 나 삐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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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남편이 찍은 한 장의 사진에 아내가 쓴 글을 덧붙여 하나의 기록으로 꾸준히 남겨보면 어떨까? 언제나 글쓰기에 목말라 있는 아내의 욕구도 채우고 남편과 아내가 함께 참여하는 창작물도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부부의 부캐라는 매거진을 만들게 되었다. 공연회사 다니는 남편의 부캐('부캐릭터'의 줄임말)는 사진을 찍고, 고등학교 사회 선생인 아내의 부캐는 글을 쓴다. 원래 누가 시켜서 하는 일 빼고는 다 재밌지 않나? 그래서 부부의 부캐는 둘만(어쩌면 아내 혼자만) 재밌는 기획을 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오빠, 오늘 사진 한 장 꼭 찍어와. 안 그럼 나 삐질 거야.' 먼저 출근을 하는 아내가 문을 나서며 남편에게 던진 말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부캐 놀이에 남편이 혹여나 협조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서였다. 다행히 남편은 (퇴근길에 급조한 듯 보이는) 사진을 찍어왔고 아내는 그 사진을 보며 글을 쓰고 있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2)에서 남자 주인공 에단 호크는 여주인공 줄리 델피에게 이런 말을 한다. '왜 개는 단지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자고 있을 뿐인데 아름답지만, 은행 ATM에서 돈을 뽑아 나오는 남자는 멍청해 보이는 거지?(I mean, why is your dog so great just for sleeping in the sun? And a guy getting money out of a bank machine is a moron)?'


  인간의 일상적 행위들이 너무 평가절하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건 나(아내)만의 불만일까? 그 일상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만들기에 사소한 사건과 대화 또는 다툼까지도 moron한 게 아니라, so great한 것일 텐데. 사소한 일상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면 우리 삶엔 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남을까?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유자차>라는  가사의 일부이다. 가사가  좋은데  부분만 수정하면 어떨까? 우리 '좋았던' 날들에서 '좋았던' 지워버리는 거다. '우리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좋든 나쁘든 우리 함께한 모든 날들의 기억을 기록이란 설탕에 켜켜이 묻어 두자. 사소한 대화와 사건 그리고 다툼까지도. 그럼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을 테니까. 부부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남편이 마침 바닥에 떨어진 빨간 클립을 사진으로 찍어왔다. 노을 진 하늘도, 우거진 나무도, 귀여운 길고양이도 아닌 사무실 바닥 어디서나 뒹굴만한 클립을 말이다. 아내는 남편이 찍어온 클립이 마음에 들었다. 사소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특별한 빨간 클립. 이 별 것도 아닌(실은 별 것이지만) 우리의 기록들을 이제 켜켜이 묻어가야겠다. 무엇보다 꾸준할 수 있길 다짐하며 시작한다. 남편이 사진을 찍어오지 않는 날들이 반복돼 아내는 삐지고, 결국 둘의 냉전이 지속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것도 뭐 하나의 에피소드는 될 수 있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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