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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May 23. 2021

“그냥,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MZ 딸에게 쓰는 꼰대 아빠의 이야기 9 – 연애에 대하여

연애한다는 딸이 주말인데도 나가지 않고 집에 있다. 2주째다. 밖으로만 돌고 한 번 나가면 오리무중이 되어서 저녁만 되면 내 눈이 벽시계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녀석이다. 그런데 2주씩이나 방구석에 있다? 애인이 생겼다는 녀석이? 

분명 이상 징조다. 데이트 없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그냥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잠시 떨어져 있자고 했단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짧다. 그냥 좀 피곤해서...     


며칠 전, 사람 관계가 왜 이리 전쟁 같으냐고 녀석이 푸념했다. 그렇지. 연애는 전쟁이지. 내 젊은 시절을 돌아봐도 분명 전쟁이다. 그런데 직장에서의 사람 관계는 더 숨 막히는 전쟁이다. 생존은 물론 자존감까지 걸려 있어서 훨씬 치열하다. 녀석은 요즘 직장 상사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털어놓고 하소연해서 해결할 성격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부담을 주거나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문제를 껴안고 동굴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남자친구는 녀석의 낯빛과 목소리가 어두워진 것을 보고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딸은 더 입이 무거워지고, 남자친구는 더 안타까워서 재차 물었을 거야. 그러면 녀석은 더 미안하고 조심스럽겠지. 아직은 덜 미덥기도 해서 한발 물러서려고 했을 거야. 그래, 힘든 속마음 털어놓다가 울음이라도 터지면 겨우 이 정도 사람이었나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차라리 잠시 떨어져 있는 게 나을 수 있어.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연애 시절이 기억났다. 아내는 밀당을 못한다. 여우 보다는 곰에 가깝다. 속이 천불 나도 상황을 모면하려고 둘러대거나 속이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하고 한결같다. 그러고 보니 문제를 싸 들고 혼자 굴속으로 들어가는 딸은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런 아내가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한 적이 있다. 하루도 안 보면 못살 것 같던 캠퍼스 커플 시절의 어느 날, 아내가 난데없이 당분간 못 만날 것 같다고 했다. 왜? 무슨? 무엇 때문에? 언제까지? 혹시...? 그러면서도 나는 대범한 척 알았다며 아내와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 날 모든 게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해야 할 일, 들어야 하는 수업, 만날 약속 모두 중요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혹시 어디서 울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이 달라진 것은 아닌지 등등 갖은 생각이 맴돌고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아내의 집 앞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니 딸아이 남자친구의 기분이 살짝 이해되었다.      

30년 이상 지난 이야기지만 손에 쥔 핸드폰만 뺀다면 요즘 청춘남녀들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대화하는 내내 까똑까똑, 문자 진동, 전화수신 불빛으로 딸의 전화는 소란스러웠다. 시간이 필요한 이유를 알려줬느냐고 물어보니 아니란다.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고. 그러는데 다시 메시지가 왔다. 밥 먹자고 한다며, 지금 집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딸에게 연애 시절 아내와 있었던 일을 짧게 이야기한 다음 말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귀찮게 할 수 있더라도 그냥 지금 네가 힘들다는 것은 말해주렴. 너도 힘든데 그 친구까지 힘들면 두 배로 손해잖아. 지금 그 친구는 널 돕고 싶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서 더 힘이 들지도 몰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노을 내리는 주말 저녁, 그렇게 딸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훨씬 편안한 표정이 되어서 돌아왔다. 

    

세상은 전쟁터라고 한다. 이겨서 물리치고 빨라져서 앞서려고 한다. 아무도 덤비지 못할 위력과 강력한 무기를 갖추려고 애쓴다. 두려워 긴장하고 성벽을 높이 쌓으며 그 속에서 더 외로워진다. 어쩌면 외로움은 습성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생각 외로 도움받기에 서투르다.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지,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지, 오해하지나 않을지 걱정되어 도와달라고 하지 못한다. 도와달라고 해 보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니 도와달라고 하는 방법을 모를 수도 있다.      


7살 손자는 블록을 좋아한다. 머릿속 그림을 블록으로 쌓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5살 동생이 자꾸 방해한다. 형이 만드는 게 신기하고 부러운지 자꾸 건드려서 방해한다. 몇 번 하지 말라고 하다가 화를 내고 때려서 동생을 울린다. 그리고는 같이 운다. 망가진 블록을 모두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린다. 그냥 엄마에게 도와달라고만 말해도 될 일일텐데... 그래서 나는 요즘 손자들에게 도와주세요~ 하는 것을 가르친다. 초롱초롱 녀석들의 눈이 예쁘다.     


                                                                             <강한진  hjkangmg@hanmail.net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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