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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May 26. 2021

길의 마음

MZ 딸에게 쓰는 꼰대 아빠의 이야기 10 –배운 사람의 삶의 길

만났을 때 더 반가운 사람이 있다. 그리 친하지도 않고 많은 도움을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훨씬 반갑고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김형이 그런 사람이다. 아마 반년만인 것 같다. 그동안 공부했다고 한다. 공인중개사를 준비했는데 떨어졌다면서도 웃음이 편안하다. 비슷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떻게 공부했는지 어떤 문제집 해설집이 좋은지, 어느 학원 어느 강사가 족집게인지 등 갖가지 말이 나왔다.


조용히 듣던 김형이 자기는 민법 때문에 망했다고 했다. 나도 나도 동의가 나오고 왜 실패했고 무엇이 어려웠고 몇 번 문제가 이해 안 되었는지 쏟아졌다. 어느덧 대화는 시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김형이 다시 슬쩍 웃으며 “그런데 법에도 마음이 있더라고요”라고 지나치듯 말했다. 별로 귀 기울인 사람이 없어 보였으나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어와 새겨졌다.


돌아오는 내내 그가 생각났다. 합격해서 자격증 받아 사업해서 생활하려고 그 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법의 마음'에 마음이 꽂혀서 감동하고 심취하다가 떨어졌나 보다. 실패다. 그런데 실패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본 법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계의 열쇠인 자격증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이었을까. 요즘 저 많은 법 전문가들이 본 것과 다른 것이었을까. 무엇이 얼마나 달랐을까.


돌아온 집은 불빛 없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밤이 깊어서야 딸이 들어왔다. 요즘 자주 늦는다. 파이선을 배운다고 했다. 파이선? 예지력을 가졌다는, 아폴론의 화살에 죽어 도시를 빼앗겼다는 그리스 신화 속 거대한 뱀? 인문학 강의를 듣느냐고 물으니 인공지능이라고 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알아두면 앞으로 도움될 것 같아서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딸과 대화하는데 아내가 왔다. 얼굴이 발그레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노래교실 수강생들과 노래방에서 놀다 왔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캘리그라피를 배운다며 주민학습센터를 들락거리고 글씨 카드로 집안을 온통 도배하더니 어느새 노래교실? 두어 달 되었단다. 노래 잘하는 사람이 부럽고 젊을 때 생각도 나서 시작했단다. 그러고 보니 요즘 부쩍 혼자 흥얼거린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른 것을 선택한다. 민법을 공부하던 김형이 법의 마음을 본 것처럼 파이선을 선택한 딸은 미래의 마음을, 노래를 선택한 아내는 삶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배움은 나를 휘어잡는 마음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배운 자 앞에 놓인 두 갈래길 앞에 서 있었던 200여 년 전 흑산도 청년이 생각났다.


독학의 한계에 막혀 있던 창대는 귀양 온 정약전을 만나 제자가 되면서 학문적으로 더 성장하나 스승의 사상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목민심서의 길을 따라 과거를 보고 성공하겠다며 떠났다가 현실사회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되돌아온다. 그의 앞에 있던 한 갈래 목민심서의 길은 성리학적 체제하의 목민관을 제시한 정약용의 마음을, 다른 갈래 자산어보의 길은 임금도 신하도 양반도 상놈도 없는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정약전의 마음을 상징한다. 각각 현실사회 지향과 이상 사회 지향을 의미한다. 감독은 그 두 길 위에서 갈등하고 실패하는 창대를 보여주면서 배운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 아닐까.


5월 중순의 둑방 산책길. 논에는 키 작은 모가 물속에 줄 서 있다. 저들은 지금 조용히 앉아 있는 듯 보이지만 물 위로 고개를 내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중이다. 논바닥에 내린 뿌리로 땅의 기운을 끌어올려 몸을 키우느라 밤낮이 없다. 더운 여름 볕과 여러 번의 비바람을 이겨 날씨 착한 가을이면 그간 애쓴 것 모두 모아서 실하게 익혀 넘실거릴 것이다.


모퉁이를 도니 못 보던 반듯한 농로가 눈에 들어왔다. 길 모서리로 허리를 구부린 아저씨에게 인사를 섞어 웬 새길이냐고 물었더니 여태 수풀과 논두렁에 가려져 있던 것을 얼마 전에 손질하고 포장한 것이라고 한다. 아저씨는 길 모서리 자투리땅에 호미로 강낭콩과 옥수수를 심고 있었다. 이게 별것 아닌 듯해도 재미가 크다며, 이러고 버려두면 며칠 안 되어 풀더미에 묻혀 버리지만 오며 가며 호미로 슬쩍 건드리고 물 조금 뿌려주면 제법 가을 추수 거리가 된다고 했다. 마음 밭에 좋은 배움을 뿌리고도 가꾸고 관리하지 않으면 잡초더미가 덮어버린다고,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교훈을 자연이라는 교과서를 펼치며 이야기해 주었다.


창밖을 본다. 달빛이 넘쳐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다. 여기서는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 새 길 위에도 달빛은 넘치고 있을 것이다. 그 길은 어느 길 어느 들 어느 동네로 이어졌을까. 그 길가에는 어떤 바람이 숨을 쉬고 무슨 들꽃이 춤을 추고 있을까. 그 길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내일 아침에는 그 길을 따라 산책을 나서야겠다.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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