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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May 31. 2021

마농지

MZ딸에게 쓰는 꼰대 아빠의 이야기 16 – 가족에 대하여

매해 4월 어머니는 마농지를 담그셨다. 우녕밭 마늘이 한참 줄기를 세워 푸른 키를 높이면 뿌리 마늘 알이 다 차기 전에 뽑아서 마늘대를 손가락 마디만큼씩 잘라 항아리에 넣고 끓인 간장을 부어 돌멩이를 얹으셨다. 그리고 오뉴월 볕이 장독대를 쬐어 익혀주 여름날이 깊을 무렵부터는 항상 밥상 위에 올라왔다.


어머니가 대나무 엮은 차롱에 보리밥을 싸고 자리젓과 된장, 콥데사니 마늘을 챙겨서 돌 많고 척박한 보리밭으로 갈 때 진드기처럼 따라붙는 나의 반찬은 마농지였다. 누나와 형이 연한 콩잎 위에 보리밥과 자리젓, 된장을 얹으면 나는 지를 잡아 한 꺼풀씩 벗기고 짭조름하게 단맛 물든 손가락을 빨며 점심을 먹었다.


초등학교 3학년 봄 소풍, 어머니는 보리밭 솥 안에 쌀과 좁쌀을 반씩 섞은 그릇을 넣어 밥을 지었고 마농지를 씻고 찢어 참기름과 깨를 뿌려서 도시락을 쌌다. 먼 길을 걸어서 바다가 보이는 일도봉 넓은 들에 앉은 친구가 소시지와 계란 프라이를 먹을 때 나는 도시락은 열지 않고 딴 청 하며 돌아다니다가 포장 안 된 먼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어김없이 상 위에 올라 있는 마농지를 나는 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셨다.


스무 살에 떠난 고향, 대학가 하숙집과 자취집으로 떠다니는 내 삶으로 선후배와 어울던 식당의 막걸리와 안주가, 연인과 마주 앉은 카페의 커피와 케이크가 들어왔다. 회사 구내식당의 단체식과 저녁 회식, 치킨과 햄버거, 라면, 부대찌개 등 패스트푸드와 단짠 메뉴에 마음이 바쁘고 혼란스러운 사이에 고향의 맛은 더 잊혔다. 결혼과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서 메뉴의 선택권도 흘렀고 맛있는 음식에서 건강한 식사로 계속 관심이 떠다녔다. 아내의 메뉴도 영양식에서 건강식으로, 또 자연식으로 풍성해졌다. 그즈음 환갑을 넘으신 어머니는 더 이상 우녕밭을 가꾸지 않으셨다. 가끔 마주한 고향의 밥상도 자리젓과 마농지의 자리를 짙은 양념의 김치와 고기반찬이 넓혀 앉아 있었다. 낡은 집 고장 난 문틀의 창호지처럼 어머니도 어느덧 바래 있었다.


아이들이 다 떠난 지금 아내와 내가 마주하는 상은 갈수록 단출해진다. 강한 음식보다는 순한 음식이, 복잡한 조리보다는 간단한 손질이 더 좋다. 아내는 손주에게 줄 간식으로 도시락을 싸면서 주말을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산사의 정갈한 음식과 맑은 솔잎차를 만났다. 몸에 쌓인 무엇인가 씻기는 듯했다. 순하고 무던한 양념과 손맛이 낯설지 않고 기억 깊이 있던 익숙함인 듯 편안했다.


매일 지나는 산책로 곁의 밭 두어 고랑 마늘이 푸르다. 유채꽃이 노랗게 울담을 덮고 올래 위로 넘치려 할  무렵 어머니는 우녕밭에 허리 숙여 호미질을 했다. 맞아. 지금쯤 마농지를 담그셨어. 간장 끓이는 냄새가 고약했었지. 고향 여동생과 통화하다 마농지 담갔느냐고 물었다. 눈치 빠른 여동생이 안 담근 지 오래되었으나 오빠가 먹고 싶다면 조금 담가 보내겠다고 했다. 괜히 무안해져서 괜찮다 얼버무리며 얼른 전화를 끊었다.


한 보름 지났을까. 이른 아침인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마트폰에 뜬 동생 이름을 본 순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한 적이 없는데 싶으니 마음이 철렁했다. 바람에 떠는 낡은 문틀 창호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금 주저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과수원에 농약 작업을 하러 가는 길이라 일찍 전화한다며, 오늘 택배로 마농지를 보내니 두어 주 상온에 두고 충분히 익힌 다음 먹으라고 했다. 마음이 가라앉으며 길게 한숨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무슨 일 있느냐고 조심스레 동생이 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렇다고 얼버무리며 전화를 마쳤다.


이틀 후, 택배가 도착했다. 정성스레 묶은 포장 속에 검붉은 간장 소스에 잠긴 마농지 두 통이 들어 있었다. 한쪽을 꺼내어 입에 넣고 씹었다. 오드득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혀 깊이 흘러드는 짭조름한 단맛. 오뉴월 까시랍던 보리 이삭과 땡볕 덥던 학교 가던 자갈길, 오가면서 따먹던 보리 딸기와 아지랑이 오르는 듯 어지러운 봄 바다, 마음 바쁠 때는 보이지 않다가 조금 가라앉으면 다시 보이는 기억 저편의 흑백사진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 뒤에 배경인 듯 그림자인 듯 어머니가 계셨다.


고작 전화 목소리에도 반기시는, 녹음기처럼 같은 말만 되돌려하시는, 어렵사리 오셔도 이틀 지나면 답답하다며 기어이 돌아가시는, 한해 한 해 저무는 꽃 같은, 이제는 마농 밭 호미 잡을 힘이 없으신, 낡은 창호지처럼 하나 하나 이야기 무늬들을 지우시는 어머니. 그날 아침 나의 가슴을 철렁인 것은 오도독 소리로 목젖을 넘은 마농지의 짭조름한 단맛처럼 검디 검디 검붉어지는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었다.     


                                                                                                                                                  <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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