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라는 선물
쨍한 여름 햇살 아래, 경복궁 벤치에 젊은 여자가 드러누워 있고, 일곱 살 남자아이는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엄마는 너를 키우며 수많은 장면을 마음속에 사진처럼 저장해 왔지만, 그날의 경복궁 풍경만큼은 유난히 또렷하게 남아 있어.
나는 너에게 경복궁을 보여주고, 그 안에 담긴 역사까지 들려주고 싶어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너와 함께 무모하게(?) 서울로 상경했지.
하지만 어린 너는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이 지루한 듯 고개를 돌리고 딴청만 부렸어.
그런 너를 보며 살짝 실망했고, 무더위와 긴 여정에 지쳐 나는 결국 벤치에 몸을 눕히고 말았지.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만 감았는데,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금세 얕은 잠에 빠졌어.
얼마 후 깜짝 놀라 눈을 떴지. 너를 잃어버린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거든.
그런데 네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흙바닥에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
사실 너와 함께한 추억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날의 경복궁은 엄마에게 특별했어.
아마도 우리 둘이 함께한 첫 여행이었기 때문이겠지.
그날 엄마는 속으로 생각했어.
‘도대체 나는 왜 이 낯선 서울 한복판에서, 아들과 함께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그땐 그냥, 너에게 뭔가 좋은 걸 보여주고 싶었던 괴짜 엄마의 취향쯤으로 여겼지.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
그 마음의 뿌리는, 엄마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어느 여름날의 기억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어느 해 여름, 할아버지가 고향에 볼일이 있어 합천으로 가던 길에 나를 데려갔던 적이 있어. 여행이라기보단, 할아버지의 귀성길에 내가 덩달아 얹힌 셈이었지.
나는 차에서 멀미를 심하게 했고, 할아버지는 휴게소에 차를 세워 병에 든 콜라 하나를 사주셨어.
그 차가운 콜라 한 모금은 속을 휘저었던 멀미를 단번에 가라앉혀 줬고, 그제야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국도를 따라 줄지어 늘어 선 삼각형 나무들, 무뚝뚝하던 할아버지의 말 없는 배려. 그리고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엄마가 처음으로 고지식한 할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었던 순간이.
그때 본 나무 이름은 아직도 모르겠지만.
무슨 말이냐고?
자식이라고 해서 누구나 부모를 처음부터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날은, 엄마가 아버지를 ‘오, 우리 아빠 좀 좋은데.’라고 느꼈던 첫 기억이었어.
아마 그래서였을 거야.
엄마는 너에게도 그런 기억 하나쯤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순간이, 언젠가 네 마음속에 따뜻한 시간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보이진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빛깔이 선명해지는 추억 선물처럼 말이야.
언젠가 네가 혼자 먼 길을 걸어갈 때,
그날의 햇살, 엄마의 눈빛, 흙 위에 그리던 네 그림이
너를 아주 잠시라도 미소 짓게 해 주기를….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기억해주면 좋겠어
그게 엄마가 바랐던, 진짜 여행의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