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9시 10분 전, 빼꼼히 문이 열리면

내 생애 가장 감사한 인연, 산후도우미 이모님께.

by 임희정

이모님.


저는 매번 이렇게 부르고는 무언가를 계속 부탁드리곤 했죠. 아이를, 저를, 집안일을. 그러면 이모님은 항상 다정하고 능숙한 손길로 아이를 보살피고, 제 밥을 차려주시고, 집안 곳곳을 살펴 주셨습니다. 사실 이모님은 그 일들을 해 주시려고 온 분이지만, 저는 그 부탁이 어색하고 낯설어 아이를 낳고 산후도우미를 쓸 생각을 못 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미련한 마음이었죠.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 무언가를 계속 청해야 하는 것과 처음 보는 누군가와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종일 같이 집 안에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게 저는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평생 뭐든 혼자 해내 왔던 제 성격은 무조건 쉬고 도움받아야 하는 산모와 맞지 않았어요. 저는 매번 ‘도와줘’라는 말보다 ‘내가 할게’라고 자주 말하곤 했거든요. 출산과 육아가 이렇게까지 고된 일인 줄 모르고 처음 엄마가 된 저는 이전의 삶과 똑같이 의욕과 노력으로 나와 남편이 함께 애쓰면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조리원에서 나와 생후 20일 된 아이를 안고 처음 집에 왔을 때 제가 느낀 감정은 기쁨도 안도도 아닌 두려움이었어요. 너무나 작고 여린 이 아이를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몸은 아프고 맘은 불안하고 끊임없이 우는 아이 앞에서 허둥대는 하루하루가 계속됐습니다. 그때의 일주일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어요. 벼랑 끝에서 이모님을 만났지요.



그때의 일주일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어요.




이모님은 항상 9시가 되기 10분 전에 조심스럽게 똑똑하고 현관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아이가 자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매번 조용히 나타나셨지요. 갓난아이도 처음 살아보는 생이 피곤한지 자주 잠들고 수시로 깼어요. 9시가 다가오면 저도 항상 현관문을 열어 신발 한쪽을 사이에 껴 빼꼼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언제든 열고 들어오실 수 있게요. 저도 그 틈만큼 하루하루 이모님께 마음을 열었던 것 같아요.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모님은 아이 돌보는 일을 해오셨다고 했어요. 그 햇수를 말할 땐 목소리를 낮추셨죠. 자기 나이가 너무 많다며. 회사에서는 나이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며. 어르신의 모습에 연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저도 그 정도일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나이에 비해 이모님은 일어날 때도 끙 소리 한 번 낸 적 없고, 까만 가방을 메고 빠르지는 않지만 곧고 힘 있게 저희 집으로 출근하고 퇴근하셨으니까요. 저는 그 모습을 한 번씩 바라보곤 했어요. 아침엔 기다렸고 저녁엔 아쉬웠거든요.






삼십 대 때 주부였던 이모님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동네에 있는데 옆집 여자가 매일같이 어딜 가는 걸 봤다고 했지요. 어느 날 어딜가냐 물어보니 ‘돈 벌러’ 간다고 했다고요. 그래서 뭘 해서 돈을 버냐 물어보니 아이 보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고 했어요. 많은 여성의 삶이 집 안에만 머물러 있었던 시절이었겠죠. 육아를 집 밖에서 하면 돈이 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을 것이고요. 일도 하고 싶고 돈도 필요했던 이모님은 나도 그 일을 좀 할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고 했어요. 그렇게 집 밖으로 나와 산후도우미 일을 시작하게 되셨죠.


그 시절에는 부유한 사람들만이 가사도우미나 산후도우미를 썼기에 이모님은 강남의 부잣집 아이들을 많이 보셨다고 했어요. 그 집의 엄마는 매일 아침 자기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주렁주렁 양손에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집에 들어오곤 했다고 하셨지요. 가끔씩 그 쇼핑백 중 하나는 이모님 꺼 이기도 했다고요. 그게 자기에겐 보너스 같은 거였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면 잠깐씩 엄마가 아니라 제 딸의 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 오래된 이야기 앞에서 저는 산모가 아니라 할머님께 옛날이야기를 듣는 손녀가 되곤 했었으니까요.


이모님은 성실했고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나 겸손했기에 그 아파트 단지에 애 잘 보는 사람이 있다고 소문이 나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어요. 처음 아이를 돌봐준 집에서 둘째를 낳고 셋째를 낳으면 어김없이 또 이모님을 부르셨다고요.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 청소 도우미는 로봇청소기와 업체가, 가사도우미는 반찬가게와 외식이 대신하게 됐지만, 산후 도우미는 대체될 수 없었죠. 신생아를 돌보는 일은 기계도 기업도 완전히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경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특히나 아이를 키워본 엄마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부유한 집만이 아니라 아이를 낳은 집 어디라도 산후 도우미가 필요하게 됐잖아요. 그래서 이모님의 경력은 40년 넘게 이어지고 있고요.






저는 이모님께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신생아 목욕시키는 방법부터 우는 아이를 달래는 법, 모유 수유하는 법과 배추 된장국을 맛있게 끓이는 법도요. 말라버린 찬밥은 새 밥을 할 때 그 위에 얹어 같이 돌려주면 된다고 하셨고, 행주는 아기 비누로 빨아 봉투에 담아 전자 레인지에 돌리면 삶은 것처럼 깨끗해진다고 하셨고, 고기는 소분해 봉지 안에 꼬아서 묶어 놓은 후 잘라서 한 덩어리씩 쓰면 된다고 하셨죠. 아기도 살려고 온몸에 힘을 주고 있으니 온종일 꽉 쥐고 있는 주먹을 펴 손바닥을 주물러 주고, 팔도 다리도 발바닥도 한 번씩 꾹꾹 눌러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젖몸살이 심해 유축할 때마다 울 때면 엄마가 울면서 젖을 짜면 그 젖을 먹은 아가도 유난히 찡얼댄다고 울지 말라고 하셨고요. 저는 다 기억해요. 한마디 한마디가 저와 아이를 모두 살리는 말이었거든요. 이모님의 그 말들 덕분에 그때의 이 주일은 죽음보다 삶에 가까워졌던 시간이었어요.


저는 다 기억해요.



이모님이 이 일을 아주아주 오래오래 하셨으면 좋겠어요. 이모님은 제가 만난 가장 노련하고 능숙하고 성실한 삶의 경력자이시거든요. 그 경험과 노하우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필요한 이야기이고, 할 수 있다면 저는 이모님을 복제해 신생아를 키우는 처음 부모가 된 사람들 집집마다 둘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이모님은 어른의 어른 같은 분이라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꼭 필요한 존재거든요.

이모님은 제 아이에게 항상 무언가를 할 때마다 먼저 말로 알려주곤 하셨어요. ‘이제 목욕할 거야 물소리 들리지? 이건 물이야.’ ‘이건 이불이야. 만지면 보드랍고 덮으면 따뜻하지?’ ‘엄마 여깄어. 엄마 할머니 옆에 있어 걱정 마.’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 뱃속에만 있다가 세상에 나와 모든 것이 낯설고 잘 보이지도 않는 아이에게 항상 냄새를 맡게 하고 촉감을 느끼게 하고 귀로 듣게 했던 이모님의 행동들이 얼마나 큰 배려였는지. 부족한 감각은 다른 자극으로 알려 주며 항상 안심시켜 주려 하셨던 동작들이 얼마나 큰 노력이었는지. 다시금 기억하며 한없이 감사해집니다.


퇴근할 때도 마지막으로 현관 바닥에 있던 신발들까지 가지런히 정리해 주고 나가셨던 이모님. 문이 닫히고 반듯하게 놓여있는 제 슬리퍼를 보며 저도 매일 마음을 다시 바르게 다잡곤 했어요. 배추 된장국을 끓일 때마다, 남아 있는 찬밥을 볼 때마다, 아이를 목욕시킬 때마다, 이모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면 괜히 현관문을 열어 신발 한쪽을 껴두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빼꼼 언제든 이모님이 들어오실 수 있게요.


매일 아침 9시 10분 전, 그 틈 사이로 들어왔던 건 이모님도 산후도우미도 아닌, 한 사람의 참된 40년의 생애였네요. 그날들 덕분에 처음 엄마가 되어 제 생애 가장 서툴렀던 시기를 잘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모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