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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Jul 31. 2022

빨래를 개키다가



나의 말들은 좌절에서 나온다.

‘분노와 애정’ - 수전 그리핀    



 

     

빨래를 개키다가 노트북을 켰다. 아이를 낳은 후 내 사유는 자꾸만 집안일을 하며 일어난다. 화장실의 핑크빛 물때를 박박 문지르다가, 접으면 손바닥만 해지는 아이 옷을 보다가, 냉장고의 썩고 곰팡이 핀 음식물들을 보다가. 집안일은 매 순간 나를 덮치고. 내 분노는 자꾸만 부엌과 화장실, 거실과 방에서 터진다.

    

커피를 마시고 쓴 글과 설거지를 하고 쓴 글은 결이 달랐다. 에세이 작가로 쓴 문장과 지친 엄마가 쓴 문장은 모두 내가 썼어도 한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 글이 아닌 것 같았다. 커피 냄새 밴 손과 고무장갑 냄새 밴 손은 한 사람의 팔목에 달려있어도 다른 손이 되었다.





     

집 밖 일은 많으면 신경이 쓰이고 피곤할 뿐인데 집안일은 많으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생각해보니 나는 종종 집 밖 일에서도 재능기부나 무료로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짜증이 났던 것 같다. 가사노동. 지구 역사상 아주 오래된 한 분야의 노동이 무급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고 빨래하고 청소할 때마다 돈 달라는 거 아니다. 보상은 자본뿐 아니라 인정으로도 이뤄지는 법이다. 출산 후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고 육아를 하는 친구들은 전화 통화에서 자주 말하곤 했다. ‘내가 이제 돈 안 벌고 집에서 노니까...’      


나는 아이와 집에서 놀아 ‘준’적은 있어도 그냥 놀아 ‘본’적은 없다. 집안에서도 해야 할 ‘일’은 넘쳐났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주부, 엄마, 워킹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전‘업’ 주부인 여성은 왜 논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도 집안일과 육아를 노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그릇된 것들도 양이 많아지면 보통과 평균이 된다. ‘오만과 편견’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 책 제목이 있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맞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릇된 것들도 양이 많아지면 보통과 평균이 된다.




워킹맘이 된 나는 아이를 보며 일하는 다른 워킹맘들이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더 대단한 존재는 전업주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육아를 하다 일로 도망쳐 숨도 쉬고, 돈도 벌고, 잠시 엄마를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는데, 그들은 온종일 맞서고 매일 반복하고 있다. 인정과 보상도 없거나 적은 그 일을 오로지 사랑이라는 책임감과 애정으로 이어나간다. 워킹맘이든 그냥 맘이든 내가 엄마가 되니 다 맘이 쓰인다.   

  

각종 수료증과 자격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주부의 가사노동을 인정해 주는 게 이렇게도 힘든 일일 줄이야. 지난 지방선거 때 ‘남녀불문 전업주부의 가사노동에 대해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국민연금을 지원하겠다’라는 한 후보가 있었다. 정치적 이념과 실현 가능성을 떠나 이런 공약은 지지하고 싶었다.      







엄마가 된 나는 자꾸만 글로 싸운다. 이 싸움이 무슨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나 싶지만, 어쩌면 지구에서 가장 예의 있고 평화로운 싸움 아닌가. 그렇다면 더 싸워야지. 아니 더 ‘써야지’.


아이 반찬 만들기와 맞바꾼 이 한 편의 글이 나라는 못 구할망정 ‘나’라도 구할 테지. 우아하고 조용하게 내 방식대로 계속 쓰며 싸우고 싶다. 나의 말들은 좌절에서 나오고, 앞으로도 나는 아프고 분노하고 슬플 것이므로.     


내 글에선 콜드 브루 커피 향과 묵은지와 아기 섬유유연제 냄새가 동시에 난다.   


 










나의 싸움 –신현림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과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이 시를 바칩니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부끄러운 안부를 전합니다. 건강하세요!   


-임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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