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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May 29. 2021

새언니 내 언니

내 앞에 놓인 얼룩들을 새하얗게 닦아 주고 간 언니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옷과 가방, 신발 때문이었다. 학생 때 언니랑 체구가 비슷해 옷을 같이 입고 가방도 번갈아 쓰고 신발도 같이 신는 친구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나는 청바지도 청치마도 둘 다 사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더 많이 입을 것 같은 청바지를 사서 입어야 했다.


친구가 어느 날 내가 사고 싶었던 청치마를 입고 나왔는데 ‘이거 언니가 산 건데 내가 입고 나왔어’라고 얘길 하면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나에게도 언니가 있다면 내가 청바지를 사면 언니가 청치마를 사고, 번갈아 가며 둘 다 입을 수 있을 텐데. 나에게도 언니가 있다면 조금 비싼 가방도 언니와 내가 함께 용돈을 모아 살 수 있을 텐데. 나는 나이키 코르테즈도 신고 싶고 반스도 신고 싶은데 언니가 있다면 하나씩 사면될 텐데.


수많은 ‘있을 텐데’와 ‘될 텐데’ 때문에 언니가 있었으면 싶었다. 정작 자매들이 네가 입어서 옷이 늘어났네, 내가 신으려고 했는데 먼저 신고 갔네, 하며 티격태격 맨날 싸우는 건 생각 못 한 채 온전히 더 많은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언니가 있었으면 했다.     



수많은 ‘있을 텐데’와 ‘될 텐데’ 때문에 언니가 있었으면 싶었다.




새언니를 처음 본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갔는데 그곳에 새언니가 있었다. 그때 언니는 위아래 하얀색 추리닝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추리닝이 회색과 검은색, 남색이 아닌 하얀색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 하얀 추리닝을 입은 언니가 너무너무 예뻐 보여서 사실은 예쁜 편이 아닌(언니 미안) 언니의 얼굴까지 너무나 예뻐 보였다.


그때 언니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내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뒷머리를 띄우려고 스프레이를 뿌렸던 나는 그게 가라앉을까 신경 쓰였다. “어머 얘 스프레이 뿌렸네?” 언니가 나에게 한 첫마디였다. 첫인사가 안녕도 없이 ‘어머 얘’라니. 나를 애 취급하는 말투가 거슬렸다. 애한테 애 취급을 하는데 나는 왜 화가 났던가. 애라서 그랬겠지.


그때의 나는 중1. 중2병이 스멀스멀 오고 있던 나이였다. 스프레이로 조금 더 어른인 척하고 싶었던 나이였다. 애가 어른인 척하는 것만큼 애를 티 내는 것도 없지 않은가. 열네 살의 나는 스물두 살의 언니가 질투나 여덟 살을 한꺼번에 먹고 싶었다. 그때는 나이가 많은 게 샘나는 시기. 어른이 되면 나이가 적은 게 부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성급히 시간이 흘러버리기를 바랐었다. 그것이 언니와의 첫 만남이었다.  







   


스물두 살의 언니는 스물세 살의 큰오빠를 만나 할머니가 살고 있고 오빠가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던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양장리로 갔다. 노화와 치매로 하루 종일 옆에서 간병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할머니를 위해 오빠는 간병인을 쓸 돈이 없어 대신 언니를 데리고 간 것이다. 우리 가족은 형편과 사정상 할머니가 오빠들을 시골에서 키웠고, 엄마와 아빠는 서울로 올라와 나를 낳아 키웠다. 오빠에게는 할머니가 엄마였던 거다.     


오빠는 생각했을까. 엄마 대신 자기를 키워주었던 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죽을 때까지 그 곁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렇게 오빠는 언니 손을 잡고 무작정 시골로 내려갔다. 멋모르고 순수하고 착하고, 무엇보다 오빠를 사랑했던 언니는 그 깡촌에서 할머니의 대소변을 치우며 매일 간병을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언니가 너무너무 착해서 화가 나려고 한다. 어떻게 스물두 살의 처녀가 그럴 수 있지? 너무나 예쁘고도 예쁠 나이에 언니는 갑자기 엄마라고 해도 하기 힘든 생판 모르는 한 노인네의 병수발을 사랑하는 남자의 할머니라는 이유로 열심히 해버렸던 것이다. 이건 대견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거다. 정말이지 너무나 대단한 거다.     


할머니도 언니의 대단함을 아셨던 걸까. 치매로 사람 구분조차 잘 못 할 정도였던 할머니는 죽기 직전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금반지를 빼 힘겹게 언니의 엄지손가락에 끼워주고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상을 치르던 날, 그곳에서 제일 크고 구슬프게 울었던 사람은 아빠도 작은 아빠도 아닌 새언니였다. 수발하며 힘들다 투정을 부려도 모자랄 판국에 할머니와 정까지 들어버려서 가족 누구보다 구슬프게 울었다. 언니는 주저앉아 땅바닥을 손으로 치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는데, 손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딱 딱’ 소리가 났다. 반지가 바닥에 부딪혀 나는 소리였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언니의 엄지손가락에는 할머니의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손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딱 딱’ 소리가 났다.



내가 광주에 있는 직장에 합격해 급하게 내려가야 했을 때, 큰오빠는 자신이 일할 때 몰던 1톤 냉동 탑차를 끌고 나의 이사를 도와주기 위해 언니를 태워 집으로 왔다. 옷가지와 이런저런 물건들을 챙겨 차에 싣고, 오빠가 앉은 운전석과 언니가 앉은 보조석 사이에 엉덩이를 걸치고서는 광주로 내려갔다. 항상 독립을 꿈꿨지만 급작스럽게 부모와 떨어지게 돼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났던 나는 둘 사이에 우뚝 솟아 앉아있던 탓에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심하게 덜컹거려 차오른 눈물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했다. 고개를 젖히고 꿀꺽꿀꺽 눈물을 삼키며 호남고속도로에서 잠이 들었다.


내가 잠들었을 때 언니가 앉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떨궜는지 오빠가 운전하고 있는 왼쪽으로 고개를 떨궜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광주에 도착했을 땐 거의 언니 가슴팍에 파묻힐 정도로 내 몸은 쏠려있었다. 언니에게 폭 안겨있는 거나 진배없었다. 언니도 잠들어서 다행이었다.     


타향살이와 자취를 동시에 처음 하게 된 나는 얼떨떨해 원룸 현관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멍하니 방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나와 달리 언니는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아와 방바닥을 쓱싹쓱싹 닦아주었고, 오빠는 끙끙 짐을 옮겨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잘 지내라며 손을 흔들고 재빠르게 트럭을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모든 것이 얼떨떨해 느릿느릿했던 나와 달리 둘은 참 후다닥 이었다. 다시 4시간 가까이 걸려 서울로 올라가야 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남은 사람은 서운했고 떠난 사람은 후련했다. 한쪽에 걸레가 널려져 있는 원룸에서 나는 그날 조금 울었고, 금세 잠이 들었다.    


  

남은 사람은 서운했고 떠난 사람은 후련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엔 제주에 있는 직장에 합격해 또 급하게 내려가야 했을 때도 한걸음에 와 주었던 건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아닌 새언니였다. 그때 둘째 조카가 다섯 살이었는데, 언니는 내 전화 한 통에 어린 조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또 걸레를 들고 방바닥을 닦아주고 살림살이를 정리해주었다. 나는 그런 언니가 너무 고마워 전복뚝배기를 사주고 용두암에 데려간 후 공항에 바래다주었다. 그리고는 오피스텔에 돌아와 많이 울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했을 때 언니는 또 나에게 왔다. 아이를 안고도 당장 죽을 것처럼 매가리 하나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던 나를 보고 “야! 너 오늘 당장 죽겄다?” 하더니 우는 아이를 받아 달래 재워주고, 세탁기를 돌리고, 보리차를 끓여주고 또다시 방바닥을 닦아주었다. “내가 반찬 같은 거라도 해주고 싶은데 요리를 못해서 그냥 보리차라도 끓여놨어.” 주방에 있는 온 냄비를 다 꺼내 보리차 티백을 퐁퐁퐁 넣고는 일일이 물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주고 간 언니. 냉장고 안에 먹을 거라곤 거무튀튀한 보리차뿐인데 물통만 가득한 냉장고가 어찌나 든든해 보이던지. 언니가 가고 나는 그 보리차를 꺼내 마시며 하염없이 울었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언니는 어쩜 그럴 수 있지. 밤새도록 언니 생각을 했다.


     

언니는 왜 친언니도 아니고 새언니면서 왜 스물두 살부터 지금까지 친자식과 친자매라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기꺼이 해주고 홀연히 가는 걸까. 싫다는 소리 한 번, 생색 한 번 내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매번 호탕하게 웃으며 방바닥을 닦아주고 가는 걸까. 나는 그런 새언니가 마치 헌 언니인 것만 같다.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한 가족이어서 오빠의 아내가 아닌 원래 내 친언니였던 것만 같다. 그렇게 우리 집의 며느리로 새 식구가 아닌 원래 우리 식구로 살아왔던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새언니를 단 한 번도 ‘새’ 자를 붙여 불러본 적 없다.

      

나는 그런 새언니가 마치 헌 언니인 것만 같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새하얀 추리닝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난 새언니.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앞으로 이 언니가 내가 삶에 얼룩져 침울해질 때마다 내 앞에 놓인 얼룩들을 새하얗게 닦아 주고 갈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도 모른 채 언니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질투나 하고 있었다니. 다시 돌아간다면 언니를 보자마자 와락 안기고 싶다.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스프레이로 한껏 부풀린 머리가 꺼진다 해도 마구마구 머리를 언니 품에 파묻고 싶다.      


언니가 광주의 원룸과 제주도의 오피스텔과 우리 집의 방바닥을 닦아 주고 갈 때마다 나는 마음까지 깨끗해져 매번 새로운 삶을 잘 시작하기도 하고, 우울한 마음을 걷고 다시 잘살아 볼 용기도 얻었다는 것을 언니는 알까. 새언니와 옷을 같이 입고 가방을 번갈아들고 운동화를 나눠 신은 것도 아닌데 새언니가 있어서 너무나 좋다.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언니 옷도 사주고 좋은 가방도 신발도 다 사주고 싶다. 나는 언니가 없지만, 언니 같은 새언니가 있어 참 좋다.  

    

새언니는 내 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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