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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번째 조카

지갑으로 조카를 키우고 싶다.

by 임희정

내가 중2 때 첫째 조카가 태어났다.


열다섯 살의 나는 고모가 되었는데, 그때 당시 나에겐 사실 조카가 필요 없었다. 중2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조카뿐만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도 필요가 없는 지경이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오직 친구들만 있다면 천하무적이었다.


조카가 생겼지만, 중2와 고모라는 위치는 참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조카는 지갑으로 키운다던데, 난 내 용돈 받기도 빠듯했으니 나는 고모가 되어서도 고모가 아니었다. 나는 너무 일찍 고모가 된 나머지 고모가 될 자격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중2가 고모라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큰오빠와는 여덟 살 차이가 난다. 내가 열다섯 살 때 큰오빠는 스물셋이었고, 스물둘의 새언니를 만나 왕성한 혈기와 불타는 사랑으로 조카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내가 중2병을 앓고 있을 때 고모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뭔가 아픈 고모가 된 느낌이다.






내가 제대로 고모임을 자각한 건 내 고등학교 졸업식 때였다. 그때 첫째 조카는 다섯 살이었는데 귀여움이 우주를 부숴버릴 정도여서 언니가 조카를 데리고 내 졸업식에 왔을 때 모든 친구들이 조카에게 우르르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희정이 조카래! 너무너무너무 귀엽다!” 2003년 경기도 광명에 위치한 광문고등학교 제6회 졸업식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건 학생회장도, 나도 아닌, 내 조카였다. 그때 느꼈다. 아! 내가 고모구나. 내가 저 귀엽고도 귀여운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의 고모구나. 갑자기 돈을 벌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조카에게 뭐라도 사주고 싶었던 것이다. 조카는 지갑으로 키운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 내 조카가 자라고 크고 성숙하여서 고등학생이 되자 힙합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엠넷의 프로그램 고등래퍼가 고딩들의 세계를 강타하고 있을 때. 그 기운을 내 조카도 거세게 맞아 조카는 랩을 하고 비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조카를 말릴 수 없었다. 나도, 부모인 큰오빠와 새언니도 지켜보고 응원해 주었다. 참고로 내 첫사랑은 힙합 뮤지션인데 그때 당시엔 이미 헤어진 후여서 나는 아주 잠깐 조카를 위해 내 첫사랑에게 연락해 볼까 3초 정도 망설인 기억이 있다.


'자니? 나야 너의 첫사랑. 실은 내 조카가 너처럼 힙합 뮤지션을 꿈꾸고 있는데 한 번만 만나줄 수 있을까? 나 말고 내 조카를. 조카를 좀 만나줘. 조카가 너를 많이 좋아해. 나 말고 조카가.'


혼자 연습을 해 보다 고개를 미친 듯이 휘저었다. 그건 도저히 못 할 짓이었다. 나의 조카 사랑은 첫사랑보다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이적 ⓒ유희열의스케치북




아무튼 나는 내 조카가 좋아하는 힙합 음악을 직업적으로까지 잘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고등래퍼 혹은 슈퍼스타K라도 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조카는 혼자서만 랩을 하고 비트를 만들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힙합 뮤지션에게 레슨도 받고 나름 열심히 연습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뭔가 능동적인 액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고등래퍼를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성인이 된 조카는 힙합 음악과 멀어졌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학은 가지 않았다. 일찍이 공부에 취미가 없었고 엄마와 아빠에게도 대학은 가지 않겠다 말했다. 그 누구도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냐고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큰오빠와 새언니는 누구보다 아들의 선택과 인생을 존중했다.


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을 다녔고,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했던 나는 사실 조카가 조금 걱정됐다. 학벌을 무시할 수 없는 사회에서 혹시나 조카가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지. 취업을 준비할 때 회사라는 제도권 안에서 고졸이라는 상태가 차별의 원인이 되지는 않을지. 사회와 회사는 앞 뒤 글자를 바꾸면 같아지는 거라 이러나저러나 그 두 범위 안에서 학벌주의 때문에 상처 받지는 않을지 염려되었다.


사회에서 만난 누군가 자연스레 무슨 과를 나왔냐 물어오면 ‘문과요’라고 대답하기엔 좀 애매하지 않은가. 상대방이 그 대답을 듣고 문예창착과의 줄임말이라 생각하진 않을 텐데. ‘아. 고졸이구나’ 하며 조카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금세 나는 나에게 반문했다. ‘부모도 오케이 했는데, 나 지금 되게 고모인 척하려고 하네?’ 나도 조카를 믿기로 했다.





조카는 고등학생 때 일찍이 큰오빠와 새언니에게 말했다.


‘대학은 가지 않겠다. 대신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 아르바이트하며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 그러다 못 찾으면 군대에 가겠다.’


언니와 오빠는 말했다.

“니 알아서 해라?”


나는 이 가족이 그 어떤 관계보다 쿨하지만 뜨겁게 서로를 아끼는 관계임을 너무 잘 알겠다. 우리는 알고 있다. 침묵과 응원보다 간섭과 참견이 훨씬 쉽다는 것을. 언니와 오빠는 아주 쉽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부모로서 참 어려운 것이란 것을.


사실 그건 오빠가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빠는 오빠에게도 나에게도 항상 말했다. “암시롱 안항께 니 알아서 해라!” 그래서 우리 형제는 우리 맘대로 하고 살았다. 그런 오빠가 아빠 같은 아빠가 되어 조카에게 대물림 해 준 것이다. ‘니 알아서 해라’ 정신을. 아니 ‘믿음’을.



힙합에 잠깐 심취했다가 흥미를 잃고 대학은 가지 않을 것이기에 조카는 꿈 혹은 계획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미래의 꿈과 계획이라는 것은 쉽게 생각날 수도 없고 급하게 정해서도 안 되기에 조카는 대신 돈을 벌기로 한다. 나는 조카가 부모에게 ‘나 공부하기 싫어! 대학 안 갈래!’ 하며 용돈 달라 떼쓰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안 가는 대신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꿈을 찾겠다’라고 한 그 주관이 너무 멋있다. 단순한 고집과 생떼는 납득될 수 없지만, 계획이 있는 누군가의 주관은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새언니와 오빠 또한 ‘니 알아서 해라’라고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1년 동안 고깃집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 조카는 결국 꿈은 찾지 못했고 군대에 갔다. 하필이면 최전방으로 발령을 받아 아주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 입대를 하기 전 나는 마음 같아서는 직접 얼굴을 보고 뭐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평소 자주 연락하는 것도 챙겨 주는 것도 아닌 고모가 군대에 간다는 이유로 친구들 만나기도 빠듯했을 시간에 끼어드는 건 나도 원치 않았기에 계좌에 용돈 이십만 원을 보내주었다. 조카에게 군대 잘 다녀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전에 메시지를 보낸 날짜가 3년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용돈을 보냈다고 하니 조카에게 답문이 왔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에게 최근 소식 들었습니다. 득녀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모가 너무 오랜만에 연락했지? 3년 사이 너와 나 사이는 많이 멀어졌구나. 몇 달 전 아이를 낳은 나는 조카의 문자를 보고 궁전 마마가 된 기분이 들었다.



조카는 지갑으로 키운다!




나는 여전히 고모가 될 자격이 없는 고모인 것 같지만 번듯하게 잘 자라준 조카를 생각하면 이제 돈으로라도 그 자격을 취득하고 싶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 잊을만하면 한 번씩 계좌로 용돈을 보내주는 고모가 되고 싶다. 그것이 어쩌면 조카에게 최고의 고모가 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한 가지 더 바라는 게 있다면 혹시라도 나중에 조카가 군 제대를 하고 와 사회생활을 할 때 다시 공부하고 싶다거나, 대학을 가야겠다 마음먹는다면 누구보다 든든하게 상담도 해주고 응원도 해주고 학원비도 내주고 싶다. 혹 그 길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는데 돈과 꿈 사이에서 망설일 때 적어도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진 않도록 잘 도와주고 싶다.


부모의 자리를 넘지 않는 조력과 간섭을 뺀 조언, 과도한 응원으로 조카가 부디 푸른 청춘을 만끽하며 살 수 있도록 보탬이 되는 가족이고 싶다. 조카가 고모라는 존재를 잊고 살다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나 본인이 살아온 시기를 거친 누군가의 깊은 말이 필요할 때, 엄마 아빠 친구 여자친구 친구의친구 다음 여섯 번째 정도로 나를 떠올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조카가 부디 건강하게 군 생활을 잘 마치고 오길 바란다. 제대하면 선물로 책갈피 대신 봉투를 껴서 좋은 책 한 권을 선물해 주고 싶다. 말로 하기엔 어색하고 먼 사이의 고모라 이렇게 글로 전해 본다. 늦은 감이 아주 많지만, 이제라도 지갑으로 조카를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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