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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Nov 05. 2021

우울은 양념게장이 낫게 하더라

우울의 계절이 지나고

   

지독한 산후 우울증과 그냥 우울증을 겪고 나니 한 계절이 지나 있었다. 올여름 장맛비는 하늘이 아닌 내 눈에서 다 퍼부었다. 세차게 내리던 눈물로 마음은 항상 습하고 눅눅했고 뜨거운 햇볕에도 한동안 메마를 줄 몰랐다. 이 우울을 건조하기 위해 고립과 외출, 자책과 원망, 발악과 침묵, 새벽과 아침이 반복됐다.      


깊은 우울의 동굴을 지난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이 우울증으로 내가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첫째는 생전 처음 정신과에 가본 일. 그건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내 마음을 치료해 본 일이기도 했다. 치유의 시작은 발걸음 같은 거였다. 내 마음을 들고 직접 병원을 찾아가 ‘아파요’라고 말해보는 것. 그 걸음과 말은 내가 낸 엄청난 용기였다. 동굴 밖으로 완전히 나오지 않아도 입구 가까이 까지만 나온다 해도 빛은 스며있으니까. 곧 밖으로 나올 수도 있는 거다.      


둘째는 생전 처음 친오빠와 대화를 나눈 일. 그건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에게 의지해 본 일이기도 했다. 평생 나에게 부모는 너무 가까워 버거웠고 형제는 너무 멀어 낯설었다. 한없이 나를 의지하는 부모와 오랫동안 떨어져 산 형제의 시간은 그랬다. 가족은 짐이었고, 임무와 책임이었다. 잊고 지내다가도 한 번씩 묵직하게 인식되는 존재였다.     


매일 아침 정신없이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우울이 나를 덮쳤다. 어질러져 있는 방바닥과 쌓여있는 주방, 더러운 화장실을 눈감고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어둠 속에서 마냥 울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울었다. 전화를 끊고 깨달았다. ‘나에게 가족이 있었지’ 그건 난생처음 갑자기 자기에게 전화해 통곡하며 우는 동생에게 ‘왜’라고 묻지 않는 오빠 덕분에 새삼 알게 된 거였다. 가족에겐 이유가 필요 없는 거구나. 내 우울이 계속되던 날의 아침, 어김없이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은 오전 11시 반에 오빠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아니 보니까 너가 매번 11시에 전화를 하더라고. 기다려도 오늘은 안 오길래.”


매일 내 눈물을 기다려 주던 오빠 덕분에 울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생전 처음 새언니가 양념게장을 들고 우리 집에 온 일이었다. 언니는 내가 우울증에 미쳐 날뛸 때 양념게장을 들고 집에 찾아왔다. 언니에게는 내 우울의 곡절과 증세는 중요한 거나 궁금한 게 아니었다. 다짜고짜 집에 와 문을 열고 대뜸 한 말은 “밥 안 먹었지?”였다. 새빨간 양념게장을 꺼내 반찬통에 담아주며 이거에 밥을 먹으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언니가 가고 나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흰쌀밥 한 공기를 비웠다. 접시 위에 쌓여있는 게장 껍데기들을 보며 웃었다. 배부르고 기운 나던 한 끼였다. 우울할 때마다 양념게장으로 마음을 달랬다. 정신과 약보다 효과도 빠르고 맛도 좋았다. 뭐지. 언니는 다 알고 있나. 생뚱맞고 원초적인 어떤 것들은 갑자기 무언가를 낫게 하고. 별안간 치유받은 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올여름, 발걸음을 옮기고 전화 통화를 하고 양념게장을 먹으며 우울을 버텼다. 계절은 바뀌고 내 눈에서 내리던 장맛비도 멈췄다. 가을에도 어김없이 비는 오지만, 그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세찬 빗줄기가 약해진 것만으로도 우산을 쓰고 외출할 수도 있고, 걱정 대신 감상할 수도 있다. 습기 가득했던 우울의 여름이 지나고 이제는 말라가는 계절 가을. 내 마음의 물기도 날아갈 시기.     


나를 위한 누군가의 행동과 나를 위한 나의 행동이 만나 나를 낫게 했다. 한철 지독한 우울을 겪으며 생각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것들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의외로 효과가 좋고, 게장은 밥도둑이 확실하다. 그러니 안 해 본 것도 해 보려 노력하고, 입맛이 없을 땐 게장을 주문하자. 그런 용기와 욕구가 우리를 살게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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