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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May 03. 2019

헤프고, 내질렀고, 무모했다. 후회 없다.

청춘의 나, 청춘이고 싶은 나.

나는 여유가 없었는데 여유롭게 살았다. 돈이 없었는데 부족하게 지내지 않았다. 아등바등 사는 부모님을 보며 애쓰기 싫었다. 애쓰는 삶은 대단한 것이지만 지겨웠다. 엄마는 가끔 설거지와 방청소를 하며 ‘아휴... 지겨워.’나지막이 내뱉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히 사는 아빠와 엄마는 아이러니하게도 가끔 삶이 권태로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집 앞 작은 식당에서 서빙을, 집 옆 편의점에서 계산을, 동네 우체국에서 우편물 분류를, 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한 달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내가 사고 싶은 것들을 샀다. 고2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키보드를 샀는데, 작았던 내 방에 놀 공간이 없어 책상 위에 얹어두고 쳤다. 너무 갖고 싶어 공간을 생각하지 않고 저질렀다. 그때는 내가 뮤지션이 될 거라며 터무니없었다.     




직장인이 되고 월급을 받으면 해야 할 것이 많았다.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도 있었고, 부모님께 적지만 용돈도 드리고 싶었고, 미래를 위해 차곡차곡 모아야 할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모으지 않았다. 대출은 이자만, 상환기간은 최장 길게. 앞날을 위해 저축하지 않고 오늘을 위해 자축했다. 월급을 받으면 예쁜 옷을 사러 갔고, 갖고 싶었던 것들을 구매했다. 아끼지 않았다. 누리고 싶었다. 내가 번 돈이니까 내 돈으로 만끽하고 싶었다. 그 돈으로 있는 척했고 잘난 척했다. 대기업에 다녔고 아나운서였으니 월급과 직업으로 척할 수 있었다. 나를 부잣집 딸내미로 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싫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부리는 자존심이었다. 그것이 내가 나의 환경을 잊고 지금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 같았다.    


앞날을 위해 저축하지 않고 오늘을 위해 자축했다.


엄마는 만원 앞에서 망설였지만, 나는 십만 원 앞에서도 내가 갖고 싶다면 고민이 없었다. 아빠는 돈이 없어서 없다고 생각했고, 있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게 참 답답했다. 왜 돈을 벌기만 하고 쓰지는 않지. 언제 쓰려고 안 쓰는 거지. 철없던 나는 씀씀이가 헤펐다. 부모님처럼 돈이 없어 포기하고, 앞날을 생각해 오늘날 고생하는 건 너무 싫었다. 마음이 동하면 어떻게 해서든 수단을 만들어 냈다. 무엇이든 오늘과 마음에 집중하며 선택했다. 그렇게 많이 저지르며 청춘을 보냈다. 무모함, 대책 없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살아가며 무궁무진한 걱정과 이유들은 항상 존재했다. 우리 집은 여유가 없는데, 괜한 나의 욕심이 아닐까, 지금 나의 선택이 괜찮은 걸까, 나도 많이 염려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은 많았지만 무모했고, 겁도 났지만 대범했다. 그것들을 잘라내야 내 앞에 놓인 어지러운 짐들이 깔끔해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인생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내 인생 모토이자 선택이 가벼워지는 주문이다. 열심히 중얼거리며 나의 씀씀이를 합리화했다. 내 앞에 놓인 처지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아끼고 모아야만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 선배는 나에게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까지가 너의 자산이라며 빚을 부추기기도 했다. 나에겐 빚이 빛이었으니까. 동의했다. 학자금 대출은 말 그대로 대출이었지만 그 빚을 지지 않았다면 나는 대학교에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미룰 수 있는 건 미뤄야지. 그래야 내가 우선순위가 될 수 있으니까.     




스물일곱 직장을 그만둔 후 배낭을 메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무식해서 용감했고 무모해서 떠났다. 10kg짜리 배낭을 메고 800km를 걸었다. 그때의 나는 내 앞에 놓인 현실과 사람에 치여 많이 지쳐있었다. 무작정 여행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캐리어를 들고 유유자적하는 여행은 나중에 언제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연히 서점에서 본 산티아고 순례길 책자를 보고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그때 나의 통장 잔고는 백만 원 남짓. 그 돈으로 두 달 유럽여행은 택도 없었다. 카드를 긁어 비행기 티켓을 끊고, 친구에게 배낭과 침낭을 빌려 가방을 쌌다. 대책 없는 나. 지금 생각해봐도 맹랑했다. 겁이 없었고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 가장 단순하고 찬란했던 시기. 여행을 다녀오니 카드 값 삼백만 원이 기다리고 있었고, 다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충만해졌다. 나는 카드빚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었다.   

 

스물일곱 직장을 그만둔 후 배낭을 메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무식해서 용감했고 무모해서 떠났다.


사실 지금의 나는 스물일곱의 내가 부럽다. 요즘의 나는 왠지 겁이 나고 문득 소심해진다. 선택은 망설여지고 생각의 방향은 오늘보다 다가올 날들에 향해있다. 따져보니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져서 그런 듯하다. 그때보다 생활의 여유도 생겼고, 돈도 모았고, 카드도 늘었다. 소유가 불어나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유는 확실히 심적 영역이 훨씬 크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요즘이다. 나는 여전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공식을 믿고, 마이너스만 아니라면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카드를 긁어서라도 떠날 수 있는 용기와 계획 없이 저지르는 일은 이제 쉽지 않다. 카드빚이 있으면 동력이 떨어진다. 커피 한잔을 사 마실 때도 우물쭈물 해진다. 나는 변했다. 터무니없던 나는 선택 앞에 터무니가 많아졌고, 단순했던 나는 시간 앞에 염려가 늘었다. 

     

서른둘의 한 후배가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혼자 배낭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가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그 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멋있다. 용기가 대단하다. 부럽다의 반응을 보였고, 그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무모하다. 후회할 것이다.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자신도 나이가 더 들면 저들처럼 스스로를 무모하다 생각할 것이므로, 지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떠나야 할 분명한 이유다.     




오늘을 자축하고 헤프고 담대했던 나는 청춘이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청춘이라 생각하지만 그토록 푸른 청춘은 다시 오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갖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나이 먹기 전에, 한 번쯤은 아니 여러 번쯤은 터무니없어 봐야 하는 건 아닐까? 어차피 저당 잡힐 오늘이고 두려워질 앞날이라면, 한 번쯤은 내지르고 마음대로 휘둘러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둘러봐서 다행이다. 후회 없다. 내가 쿨 한건 질러봐서다.      


비록 앞으로는 쿨하지 못해 미안할 것 같지만, 적어도 미지근한 나날들을 위해 노력은 해봐야겠다. 이제 나는 한때 뜨거웠던 청춘과 차가웠던 과거 보다, 적당한 온도의 시간들을 바란다. 알뜰까진 자신 없지만 알맞게, 대담까진 아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다가올 날들을 어떤 감정으로든 예단하지 않고, 적은 금액의 적금도 챙기면서 계속 청춘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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