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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Jul 26. 2019

'나'와 잘 살아보자

수고하고 수고하다 보면 고수가 되겠지

나는 오월에 태어났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계절 봄. 엄마는 그 좋은 계절에 온몸을 떨고 땀을 흘리며 집에서 하얀 천을 입에 물고 악을 참아 나를 낳았다. 1984년 봄. 엄마는 많이 춥고 많이 더웠다. 그해 엄마의 봄에는 여름과 겨울이 함께 있었다. 산파가 나를 받았는데 엄마의 자궁 속에서 빠져나온 나는 세상 앞에서 울지 않았다고 한다. 분명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나왔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엄마와 산파는 순간 사생아가 나온 줄 알고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다. 출산의 기쁨이 아닌 출산의 적막.


자세히 보니 태반을 벗지 않고 하얗게 둘러싸인 채 조용히 가만히 있었다고. 태반을 벗기니 그제야 악을 쓰고 울었다고 한다. 엄마가 참은 악은 나에게로 와 나는 그 악을 한 템포 느리게 세상에 질러댔다. 아가들이 태어나자마자 우는 건 엄마들이 다 질러대지 못한 악 때문일까. 아니면 뱃속에서 들은 엄마의 악을 처음으로 흉내 내어 보는 것일까. 엄마 배 속에서 세상으로 빠져나오는 그 순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태반을 찢고 나왔어야 할 나의 생에 첫 번째 임무를 간과한 것이다. 그래서 자라면서 그렇게 뭐든 알아서 하려 했나 보다. 죄책감에.      


나를 낳았던 1984년 봄. 그해 엄마의 봄에는 여름과 겨울이 함께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2월생으로 호적에 올렸다. 학교에 빨리 가라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오월에 태어났든 유월에 태어났든 할머니에게 내 주민등록번호의 생일은 01 아니면 02였을 것이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뭐가 다 대충이었고 마음대로였을까. 얼렁 뚱땅이 가능했던 시절이었겠지. 나는 세상에 몸뚱이보다 숫자로 먼저 기록되었다. 그때는 그랬다. 1, 2월생이 아니더라도 7살에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있었고, 나처럼 주민등록번호와 생일 혹은 태어난 년도도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엄마가 그랬고 나도 그랬다. 모두 여유가 없었던 시대. 뭐든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시절. 나도 빨리빨리 자라 학교에 가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성급하게 자랐는데 이상하게도 누구보다 차분했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잘 본 것도 아니었고 못 본 것도 아니었는데, 아빠는 나에게 4년제 대학교에 보내줄 수 없다며 네가 원한다면 전문대학 정도는 아빠가 노력해 등록금을 마련해보겠다고 했다. 원래는 이 대목에서 되게 슬프고 가난을 원망하고 애처로워야 하는데 익숙해서 그런가 괜찮았다. 오케이. 알겠어요 아빠! 4년제 대학교 합격통지서를 찢고 전문대학에 장학금을 받아 진학했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이제 내 힘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나가리라 마음먹었다. 아빠가 4년제에 보내줄 수 없다면 내가 가야지. 편입 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빨리 취직하길 원했다. 어디라도 들어가라. 무슨 공부를 또 하려고 하니. 학업과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력서를 썼다. 사실 나도 돈을 벌고 싶었다. 돈이 있고 싶었다. 부모님이 그토록 바라던 회사원이 되었다.      


학업과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력서를 썼다.



첫 직장생활. 공부에 미련이 많았지만 미련은 쓸모없었고 돈은 쓸 데가 많았다. 월급을 생각하며 공부를 생각하지 않았고 잘 다녀보고자 돈을 벌어보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다. 사회생활은 철저히 학력에 따라 직급이 나뉘고 대우도 다르다는 것을. 전문대졸 여사원에게는 커피 심부름, 복사, 지출결의 업무 외에 다른 것들은 주어지지 않았다. 모든 회사가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내가 다녔던 회사는 그랬다. 커피를 타고 복사를 하고 영수증을 받아 들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생각하고 창조하는 업무는 전혀 없었고 생각 없이 반복하는 업무만이 주어졌다. 나는 그 단순한 업무를 매일 반복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입사 3개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다시 편입 공부를 해야겠다고, 꼭 반드시 해야겠다고 작심했다. 3개월 동안 받은 월급을 모아 편입학원을 등록하고 생활비를 마련했다. 시험 때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학원에 제일 처음 들어가 제일 늦게 나왔다. 그때의 나는 내가 봐도 독했다. 학교는 졸업했고, 직장도 때려치웠고, 돌아갈 곳도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선택의 수가 하나밖에 없을 땐 포기하거나 모든 것을 걸게 된다. 내가 가진 모든 시간과 집중력을 걸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소시지를 입에 물고 문제집을 풀었고,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수면시간 4시간이 넘으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험 한 달 전에는 차 타는 시간도 아까워 내 방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밥 먹을 때와 화장실 갈 때 빼고는 나오지 않고 공부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4년제 대학교생. 캠퍼스를 누비며 걷고 있는데 나는 왜 이 풍경을 그리도 돌고 돌아 어렵게 보는지 스스로가 조금 애달팠다. 하지만 편입 후 다시 공부를 하며 자존감이 충만해졌다. 하면 된다. 이 진부하고 간단명료한 네 글자가 진짜임을 몸소 체험했다. 생각이 밝아졌고 꿈이 커졌다. 내가 바라는 무언가에 온 마음을 몰두한다면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자. 대학교 4학년,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졸업 후 사내 아나운서가 되었다.   


 

하면 된다. 이 진부하고 간단명료한 네 글자가 진짜임을 몸소 체험했다. 아나운서가 되었다.

 

물론 그 후로도 나의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이십 대. 입사와 퇴사를 수없이 반복했고, 직장인과 백수를 오가며 공중파 아나운서에 대한 꿈을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회사를 다니며 돈을 모으면 다시 백수가 되어 그 돈을 쓰며 아나운서 준비를 했다. 물결치고 요동치고. 중2 때는 사춘기를 이십 대에는 이십춘기를 병처럼 앓았다. 자꾸만 아나운서 최종면접에서 떨어지는 내가 아까웠다. 차라리 1, 2차에서 떨어졌다면 아니구나 받아들일 텐데, 실기와 필기시험을 거친 최종면접은 실력의 문제라기보다 그 순간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임을 알기에 운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을 치르면서도 온전히 아나운서 준비생으로만 있을 물적 심적 여유는 없었으므로 회사를 다니며 남몰래 아나운서 모집공고를 챙겨보았다. 그렇게 스물여덟 12월. 나는 마지막으로 시험을 보자 다짐했던 광주 MBC에 합격했다. 이후 제주 MBC로 이직했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돈과 꿈 사이에서 나는 많이 우유부단했다. 대기업에 들어가고 높은 연봉을 받으면 꿈을 접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기업에 들어가니 꿈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은 친구들을 보고 나는 아나운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데, 카메라 테스트를 보고 면접을 볼 때마다 통과하는 나를 보며 되겠다 싶었다. 미련은 결과를 떠나 해봐야 사라진다. 나의 가장 큰 미련은 아나운서였다. 결국은 이뤘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지름길로 가도 쉽지 않았을 것을 돌고 돌아 꾸불꾸불 많이 돌아왔다. 부모님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 나는 평범을 위해 애쓰며 사는 부모 아래서 애써 그 안정을 거부하는 자식이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가 이 미련을 없애지 않는다면 평생 서럽겠구나. 내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내가 아닌 부모를 원망하겠구나. 엄마와 아빠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는 이 감정을 극복할 수 없겠구나.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지 않겠구나. 애써 비범해지려 사서 고생했다. 청춘이었으니까.     


자라는 동안 세상은 나를 매번 보챘다.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할머니는 빨리 학교에 가라며 2월생으로 호적을 올렸고,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나에게 부모는 취직을 권유했다. 무엇보다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조급해하며 살았다. 하루하루가 애가 탔고 모든 날이 노심초사했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빨리 어른이 되라고, 얼른 성인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어린 나는 저만치 걸어오고 있는데, 어른인 척하는 나는 뛰어야만 했다. 그러니 숨이 차고 자주 넘어졌다. 넘어질 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미숙한 내가 울고 있었다.   


넘어질 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미숙한 내가 울고 있었다.

   

처음엔 잘 뛰는 내가 기특했다. 남들보다 빠른 나는 항상 앞질러 갔다. 행동은 마음이 급하면 저절로 빨라진다. 빨리 학교에 갔고, 빨리 졸업했고, 빨리 취직했다. 하지만 맨 앞에서 열심히 달리던 나는 혼자 외로웠고, 무리 지어 손잡고 천천히 잘 걸어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이제 숨이 차다. 그동안 나는 많이 수고했다.   

   

하지만 경험치는 한 사람의 가장 큰 내공이 되기에 나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생각한다.  이제 보니 다양한 경력도 남았고, 여러 곳과 많은 사람들을 통과하며 관계와 생활 속 깨달음도 얻었다. 단단한 사람. 대단한 사람만큼이나 의미 있는 인간 같다. 삶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크게 보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업으로 삼아 재미있게 살았다. 감사한 일이다.


수고하고 수고하다 보면 고수가 될 것이라 믿고 앞으로의 날들도 품 들여 보자 각오한다. ‘최고의 고수는 가장 유연한 자이다’라고 고 황현산 작가는 썼다. 그렇다면 나는 많이 휘어지고 싶다. 툭툭 끊어지고 넘어지고 부러졌던 삶이니, 이제 앞으로는 부드럽게 살아가고 싶다. 유연한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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