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것은
생의 한창, 아버지는 아주 바빴을 것이다. 노동을 하느라, 돈을 버느라, 그리고 그것들을 반복하느라 끊임없이 바빴을 것이다.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배관 심는 일을 한 건 1979년,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그때 큰오빠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 세 살배기 아들과 아내를 두고 저 멀리 열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넘어가야 했을 그 급급한 심정을 나는 차마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삶이 얼마나 급하고 간절했기에 아버지는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의 고향 전라남도 무안에서 할머니 손 아래 자랐다. 나의 부모는 아들 둘을 부모의 부모에게 맡긴 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사글세로 단칸방을 얻어 살림을 꾸리고 딸 하나를 낳았다. 아버지에게 상경은 무언가 나아져 보기 위해, 더 잘살아 보기 위해 품었던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많은 가장이 그렇게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가정통신문 속 가족 사항을 쓰는 칸에 ‘엄마, 아빠, 나’라고 적자 엄마는 말해주었다. 나에게는 오빠 둘이 있다고,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있다고, 곧 집에 올 거라고. 물론 그전에도 엄마는 나에게 오빠 얘길 해 주었고, 할머니 댁에 가면 오빠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어린 나는 한 집에 살고 있지 않은 오빠들의 존재를 자꾸만 잊곤 했다. 아마도 친오빠를 친척 오빠 정도로 인지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나에게 오빠가 있다니. 그것도 둘씩이나. 그 존재를 인정하니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방학 때마다 오빠 둘은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 오빠를 봤던 어린 나는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오빠 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볼이 발그레해져 오빠라는 관계를 잊은 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만큼 좋았고 또 좋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생일 선물로 스물세 살의 큰오빠는 나에게 삐삐를 사주었고, 열아홉의 작은 오빠는 삐삐 줄을 사주었다. 오빠가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어떤 마음을 품으면 그걸 함께 생각해 주고, 때로는 눈앞에 가져다주기도 하는 존재구나 생각이 들었다. 오빠들은 자기들과 각각 8살, 4살 터울인 막냇동생인 나를 참 예뻐해 주었다. 그 마음이 아직까지도 깊이 고맙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섯이 되었다가 셋이 되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계속 다섯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에게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방학이 오면 가까워지는 큰 기쁨이자, 방학이 끝나면 멀어져야 하는 작은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자꾸만 두 아들과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만 했던 아버지의 날들을. 오빠가 오면 반가웠고 오빠가 가면 아쉬웠을 뿐이다. 서울에 상경해 단칸방이 아닌 방이 있는 집으로 옮기면 아들을 데려와야지 했을, 아들과 딸에게 방을 주지 못해 속상했을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방을 주려고 매일매일 힘써 노동했을 그 심정을 나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인지하지 못했고 헤아리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우리 가족이 한데 모이는 날은 일 년에 네 번. 설과 추석,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었다. 그때가 다가오면 아버지는 더 열심히 돈을 벌었고, 어머니는 더 열심히 장을 봐 음식을 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보는 오빠 둘이 그저 마냥 좋았다. 우리 가족에게 명절이 어떤 의미인지, 방학이 어떤 시간인지 그 감각을 깨닫기까지 나는 지나간 시간들에 예민해져야 했다. 그래야 조금 헤아려볼 수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명절이 다가오면 아빠는 조금 설레 하는 듯했고, 엄마는 조금 바쁜 듯했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차례상을 준비하는 것 외에 아들 둘이 집에 온다는 것이 가장 앞에 놓이는 듯했다. 무뚝뚝한 오빠들도 그때만큼은 더 많은 밥을 먹었고, 더 긴 잠을 잤다. 시간과 마음을 내내 부모 곁에 두는 듯했다. 나도 늘어난 가족이 마음에 들었다. 집은 더 좁아졌는데 마음은 더 넓어졌다. 오빠의 존재가, 가족의 완성이 참 좋았다.
이제 부모의 부모는 존재하지 않고 자식의 자식이 생겨났다. 손자와 손녀까지 생긴 더 늘어난 가족이 추석이라는 명절 아래 한데 모일 시간이다. 그리고 나도 오빠에게 동생이자 고모라는 이름으로 불릴 시간이 온다. 나 역시나 가족 안에서 많은 것을 씹을 것이고 편안한 잠도 청할 것이다.
모든 것은 생의 한창의 시간, 많이 바빴던 부모의 날들 덕분이었다. 허겁지겁 애쓴 덕분에 헤어지기도 했지만 만나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그 품을 알아 만남과 이별 앞에 슬픔은 없다. 서로에게 손을 잘 흔들 뿐이다. 어서 오라고, 잘 가라고.
둥글고 환하게 부풀어 오를 보름달 앞에서 나는 마음을 한껏 부풀려 우리 가족의 안녕을, 부모의 건강을 빈다. 셋에서 다섯으로, 다섯에서 여럿으로 늘어난 가족이 한데 모이는 날. 시간은 식구를 떨어뜨려 놨다가 모아들이기도 한다. 넓으면서도 다정한 시간이다.
추석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분들도 또 함께하지 못하는 분들도, 각자의 풍경 속에서 평안한 시간들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읽어주시는 여러분들 덕분에 또 쓸 수 있었습니다. 보름달의 부피가 조금 줄어들면 제 책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많은 것들이 부족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9월 셋째 주가 될지, 넷째 주가 될지 아직 정확한 날짜는 안 나왔지만 9월 안으로는 꼭 나온답니다. 곧 한 장 한 장 넘겨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인사드릴게요. 마음도 둥근 한가위 되세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