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희정 Oct 04. 2019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주는 상담 요청

꿈은 빚지는 것이 아니라 빛나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상담 요청을 잘했다.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얘기해!”

“따로 말씀드릴게요….”     


그 상담은 선생님과 나 단둘이서만 하길 원했다.     



가정 통신문을 받아 들고 망설이는 나.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종이를 내밀며 읽어보고 사인하고 엄마 말 써서 달라고 얘길 하면, 엄마는 이게 뭐냐며 자기는 못 쓴다고 그냥 너가 써서 내라고 나에게 말했다. 텅 비어 있는 학부모 의견란. 그 칸을 보며 나도 망설였다. 내가 이걸 어떻게 써야 하지? 엄마는 의견이 있어도 쓸 수 없었다.     


엄마에게 보여드렸지만 흔적 하나 없는 가정 통신문을 들고 선생님께 제출을 하면 왜 보여드리지 않았냐, 왜 그냥 가져왔냐, 항상 물었다. 친구들의 가정 통신문에는 내 눈에 멋져 보였던 사인과 필기체로 ‘좋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와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 엄마도 누구보다 자기 딸에게 좋은 지도를 해주길 속으로 바랐을 텐데, 글자로 표현되지 못한 마음은 그저 없는 마음처럼 보였다.


어김없이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고 엄마가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사정을 말해야 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매해 받는 가정 통신문이 늘어나자 나는 어른 글씨체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귀찮았고, 그 사정을 또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흰 종이 위에 지도편달 지도편달 반복해 쓰고 ㄹ 자도 갈겨써보며, 엄마를 대신해 내가 나를 바른길로 가도록 잘 이끌어주시길 부탁드렸다.    

  

“이게 엄마 글씨 체니?”     


하지만 어린아이가 밤새 연습한 글씨는 아무리 갈겨쓴다 해도 서툴렀다. 내가 흉내 낸 어른 글씨는 어른스럽지 못했다. 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어린 내가 흉내 낸 어른 글씨는 어른스럽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자 선생님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부모님과 상의해 학비감면신청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그 얘길 듣고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 알아서 신청서를 제출했다. 상의하지 않아도 나는 나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행여나 친구들이 알까 혼자 적어 혼자 제출했던 신청서. 나의 학비감면신청서는 나 같았다.      


“오매. 학비가 줄었어야?”

“응. 학교에서 알아서 해줬어.”

“아이고야! 잘됐다!”


엄마는 기뻤지만 나는 서글펐다.


대학생 때는 학자금 대출을 받았는데, 부모님은 나의 한 학기 등록금이 얼마인지 내가 얼마의 대출을 받았고 얼마의 이자를 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고 부모가 묻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했기에. 아빠는 딸에게 등록금을 내줄 수 없어 미안하고, 나는 아빠에게 등록금으로 부담을 주기 싫어 미안했다. 나는 공부할 때마다 빚이 늘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 슬슬 취업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다. 나는 빚을 한가득 지고 졸업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꿈 앞에 쌓여 있는 빚 때문에 내 꿈은 빛나지 않았다. 빚진 내 꿈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아나운싱 수업에서 교수님의 칭찬을 들었고, 아나운서 준비를 해봐라 권유받았다. 꿈을 찾았지만 기쁘지 않았다. 걱정이 앞섰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교양 과목으로 목사님이 하는 수업을 듣게 되었다. 꼭 들어야 하는 필수 교양 과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들었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렇게 생각 없이 들어간 수업이었는데 가슴을 울리는 말들이 많았다. 꿈을 찾아 부단히 노력한 목사님의 강연을 듣고 마음이 동했다. 쉬는 시간 자판기에서 팔백 원짜리 오렌지주스 하나를 뽑아 찾아갔다.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오 그래. 고맙다. 희정이는 주말에 뭐 하며 지내니?”

“아 저는 분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요.”

“그래? 우리 집이 분당인데, 이번 주말에 아르바이트 끝나면 연락해라. 맛있는 밥 사줄게!”     


따뜻한 말로 나에게 연락처를 알려주셨던 목사님. 약속한 대로 주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찾아간 나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셨다.     

 

“희정이는 졸업하면 뭐가 하고 싶니?”     


나는 망설이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다니고 싶은데 수업료가 너무 비싸 고민이 된다고 했다. 먼저 마음을 열어 따뜻한 밥으로 나를 채워준 목사님께 나는 어느새 나의 형편과 꿈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카데미 등록금이 얼마니?”     


사실 나는 이백만 원이 넘는 아카데미 수강료 앞에서 꿈을 접고 있었다. 교수님의 칭찬과 권유를 받고 아카데미에 상담받으러 갔던 날. 부풀어 올랐던 나의 마음은 이백삼십만 원이라는 숫자 앞에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이 묻고 있었다. 네 꿈의 비용이 얼마냐고. 다음날 내 통장에는 목사님의 이름으로 이백삼십만 원이 입금되었다. 팔백 원짜리 오렌지주스는 이백삼십만 원의 수강료로 돌아왔다.


그날 내가 목사님께 오렌지주스를 건네지 않았다면 나는 아나운서가 못 되었을까?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의 꿈을 지지해주고 있다는 선명한 증거가 나를 다시 날아오르게 해 주었다. 아나운서 시험에서 떨어질 때마다 오렌지주스를 떠올렸다. 못할 것이 없었다. 다시 시험을 보고 또 도전을 하고, 결국 ‘임희정 아나운서’가 되었다.    


  

누군가 나의 꿈을 지지해주고 있다는 선명한 증거가 나를 다시 날아오르게 해 주었다.



생각해보면 삶의 서프라이즈 같은 인연들이 있었다. 상담 요청을 할 때마다 내 얘기를 깊게 들어준 사람들이 있었고,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믿고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있었기에 나는 순간순간 동력을 얻었다. 내 꿈은 은행에 빚진 것이 아니라 고마운 인연에게 마음으로 빚졌다. 그 빚을 꼭 갚아 빛나는 내 모습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이제 10년이라는 경력이 쌓이고 나도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학생으로 수업을 들었던 강의실에서 펜을 들고 수업을 하고, 한때 내가 될 수 있을까 의심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나아가게 되었다. ‘쌤’이라 불리며 누군가에게 훈수를 두기도 하는 일. 참 부끄러우면서도 마음이 가는 일이다.   

   

수업이 끝난 후 내가 그랬듯 상담 요청을 해 오는 친구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따로 얘기할까? 먼저 묻고 지그시 바라봐준다. 잠시 후 학생들은 그때의 나와 비슷한 고민들을 내 앞에 수줍게 꺼내놓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잘 들어주는 일. 이미 마음먹은 일 앞에서는 어떤 해결책도 방법도 필요 없다. 그저 그 마음먹은 일을 놓지 않고 잘 품어야 하는 것임을 알기에 놓지 말라 얘기해주고 보듬어줄 뿐이다. 상담 요청을 해온 학생들의 얼굴에서 나는 나를 본다. 얘기를 할 때마다 내가 나를 보며 다독여주는 것 같다. 잘 거쳐 가라고. 잘 거쳐 갈 수 있다고 토닥여준다.     


상담이 끝난 후 고맙다 인사를 건네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상기되어 있다. 10년 전 내가 목사님과의 상담 후 집에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꿈을 다잡았던 것처럼, 다부진 입술로 “잘해볼게요!”라고 말하는 친구들은 이미 내 눈에는 다 아나운서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주고 다독여주는 상담 요청. 한때 어릴 적 부끄러운 마음으로 내 사정을 말하며 한탄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어느덧 꿈과 고민을 나누는 상담은 내가 감탄하는 시간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거니까. 상담 요청은 부끄럽거나 주눅 드는 일이 아니다. 요청하고 요청받는 간절한 마음의 시간이다.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수업 중 한 친구가 내 앞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곧 꿈을 이룰 그 친구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칸방만큼의 가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