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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Jan 03. 2020

부모에 대한 글은 언제나 미완성

글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마음

길거리를 걷다 보면 나는 자주 곳곳에서 우리 엄마와 비슷한 엄마들을 본다. 까맣고 긴 점퍼에 털 달린 슬리퍼를 신고, 짧고 빽빽이 말려있는 파마머리를 한 채 손에는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걷고 있는 길 위의 아주머니들. 키는 아담하고 얼굴은 둥글둥글 혼잣말도 잘하고 누군가에게 말도 잘 시키고 생글생글 잘 웃고 목소리도 큰 아주머니들을 보면 어쩜 그렇게 생김새도 차림새도 말투도 다 우리 엄마와 똑같은지 생각이 든다. 걸을 때마다 이런 아주머니들을 마주치면 너무 친근해서 왠지 “엄마!” 하고 불러야 할 것만 같다.      


엄마를 보고 집을 나서면 집 앞에 또 다른 엄마 같은 아주머니가 있어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길거리에서도 뒷모습으로는 도통 구분할 수 없는 엄마와 똑같은 아주머니들이 있어서 희정엄마!라고 불러야 겨우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도 내 장바구니를 보고 말을 거는 엄마들이 있어서 대파가 세일한다며 위치도 알려주고, 쪽파가 양이 많다며 하나 사서 나누자고도 한다. 진짜 엄마 같은 다른 누군가의 엄마들. 발걸음 닿는 곳 나의 모든 아주머니들. 나는 그런 분들을 보고 있으면 다 우리 엄마 같아서 팔짱을 끼고 싶다.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팔짱을 끼고 싶다.




엄마들은 왜 다 똑같은 걸 좋아할까? 미용실에서도 나란히 앉아 제일 싸고 오래가는 거로 뽀글뽀글 똑같이 구르프를 말고, 시장에서도 빨갛고 노란 알록달록 꽃무늬가 새겨진 티셔츠를 사고, 그 화려한 티셔츠를 숨기고 죄다 까만 점퍼를 입는다. 엄마들이 점퍼를 벗으면 눈이 부시다. 그 속이 하도 알록달록해서. 하지만 아가씨였을 때 엄마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원피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던 소녀적 엄마의 흑백사진을 나는 본 적이 있으니까. 그럼 질문을 바꿔본다. 엄마들은 왜 다 똑같아지는 것일까? 똑같아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되어야 했으니까.      






늦은 저녁 길거리를 걷다 보면 나는 자주 곳곳에서 우리 아빠와 비슷한 아빠들을 본다. 축 처진 어깨에 무거운 발걸음, 표정은 없고 맹목적으로 걷고 있는, 손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바지 주머니에 그 손을 넣고 터벅터벅 걷고 있는 길 위의 아저씨들.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힘들고 지쳐 보이는지.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이런 아저씨들에게 왠지 “힘내세요!” 응원해 드려야 할 것만 같다.     


이른 아침 시간 이미 새벽에 일찍 출근해버린 아빠를 보지 못하고 집을 나서면 집 앞에서 출근 중인 다른 아저씨가 있어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길거리에서도 하루의 시작인데 이미 지쳐있는 뒷모습으로, 출근길이 퇴근길인 것 같은 누군가의 아빠들을 본다. 시선이 닿는 곳 나의 모든 아저씨들. 나는 그런 분들을 보고 있으면 모두 우리 아빠 같아서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싶다.



      

세상 모든 아빠들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싶다.




아빠들은 왜 다 지쳐있을까? 어제도 힘들었고, 오늘도 지치고, 내일도 힘겨울 시간들. 행여나 아빠들이 직장을, 일을 그만둔다고 하면 그건 진짜가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 참고 참다 목까지 차올랐을 때도 한 번 더 꿀꺽 삼키다 결국 버거워 튀어나오는 말이 아닐까. 그마저도 선언이 아니라 한탄일 뿐이다. 아빠들은 왜 다 지치는 것일까. 지치지 않을 수 없을까. 직장에서 10년을 채우면 적어도 1년은 유급휴가를 주고, 한 가지 일을 몇십 년 반복했으면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월급과 상관없이 한 달 한 달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적어도 세 번 정도만 참고 사표를 낼 것 같고, 2년 정도 일하면 이직을 할 것 같고, 10년 정도 일하면 다 버리고 여행을 떠날 것 같은데 생각한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삶의 무게는 버거워서, 줄일 수도 멈출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라 이름 지어진 두 생애는 한없이 길고 거듭되는 것이어서, 엄마에겐 엄마가 없어졌고, 아빠에겐 아빠가 너무나 많아졌다. 엄마는 자신을 지우고 주부가 되어 가족을 위해 뒷바라지를 해왔고, 아빠는 자신을 되새기며 가장이 되어 가족을 위해 노동을 하고 끊임없이 그 노동을 반복했다. 나의 부모가 그렇고, 우리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렇게 살아왔다. 세상의 업적은 돈과 직급, 명예로서가 아닌 노동과 가사노동 그리고 반복으로 쌓아져 왔다. 우리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서.      


나는 부모의 그 억겁 같은 시간 속 인내심에 할 말이 없다. 표현할 단어를 떠올릴 수 없다. 글을 쓰려다가도 자주 지우고 만다. 그 삶에 감사, 존경, 공경, 사랑, 어떤 단어를 붙여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절하고 알맞은 표현을 떠올릴 수 없다. 부모에 대한 글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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