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애 필요한 글자들을 알려드리고 싶다.
오랜만에 집에 가니 거실에 엄마가 혼자 앉아있었다. 쪼그려 앉아 둥그렇게 말린 등, 고개를 푹 숙인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딸이 온지도 모른 채 손에 든 무언가를 응시하며 나지막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엄마. 나는 그 소리가 궁금해 일부러 숨죽여 다가가 들어보았다.
‘신장... 개... 엄...’
‘중아... 요리’
‘세이리...’
엄마는 중국집과 마트 전단지를 응시하며 그 속에 보이는 단어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읽고 계셨다. 신장개업, 중화요리, 세일. 특히나 받침이 있는 단어들을 헷갈리셨다. 눈을 찌푸리고 손으로 짚어가며 한 글자 한 글자씩 그렇게 애써 읽고 있었다.
“엄마 뭐해? 나왔어!”
“오매. 왔어? 요 앞에 중국집 새로 생겼나 봐. 마트도 세이리 하네. 가 봐야 쓰겄다.”
“엄마. 세이리 아니고 세일! ㄹ 받침이잖아. 세일이라고 해야지.”
“세이리나 세일이나 그게 그거지 뭐.”
나는 엄마가 스마트폰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도 혼자 대중교통을 잘 못 타는 것도 돈 계산을 잘못하는 것도 괜찮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1950년대에 태어난 부모 세대의 많은 분들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휴대폰이야 전화를 걸고 받을 줄만 알면 되고, 대중교통이야 내가 모시고 타면 되고, 나도 돈 계산을 잘못할 때가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엄마가 한글을 잘 못 읽는 걸 마주할 때면 나는 엄마가 까마득한 옛날 사람 같다. 무언가 희미하고 막막한 느낌이 든다. 엄마가 다른 아주머니들보다 아주 먼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글자를 배웠을 때가 생각난다. 엄마는 자신도 잘 모르는 한글을 어린 딸에게 알려주기 위해 안방과 냉장고 문 앞에 큼지막하게 ‘가’부터 ‘하’까지 써진 한글 공부 포스터를 붙여놓고 나에게 읽어보라 시켰다. 그렇게 나는 글자를 배웠고, 엄마는 그때부터 글자가 써진 종이들을 자주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한글을 떼자 엄마가 한글을 잘 모른다는 것을.
어느 날 무슨 마음이 일었는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엄마를 붙잡고 ‘깍둑 노트’를 꺼내 엄마 이름 석 자를 쓰고는 따라 써보라며 엄마에게 글자를 알려 주기도 했다. 그때는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엄마에게 모두 자랑하고 알려주고 칭찬받고 싶었다. “조. 순. 덕. 이거 엄마 이름이야. 엄마도 써봐!” 그렇게 엄마는 자기 이름 석 자를 쓰기 시작했다. 내 글씨보다 더 삐뚤 배뚤 했던 엄마의 글씨. 어린 딸의 노트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연필로 꾹꾹 눌러썼던 그 시절 엄마의 마음은 뿌듯했을까 부끄러웠을까.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던 엄마는 한글을 배웠겠지만, 그 이후의 삶에 글자는 필요하지 않았기에 쓸모를 잃고 잊히고 까먹게 되었다. 평생 주부로 살아온 엄마에게는 무언가를 쓰고 읽는 일보다, 씻고 차리고 치우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글은 엄마의 생에서 어정쩡하게 자리 잡은 채 많은 시간이 지났다. 가끔 엄마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걸을 때 눈에 보이는 간판들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보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어린 시절 처음 한글을 뗐을 때 눈에 띄는 모든 글자를 읽으려 했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일흔을 앞둔 나이. 엄마는 가끔 문 앞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떼어 오랜 시간 공들여 읽는다. 그래서 신장개업, 중화요리, 세일 같은 단어들을 전단지를 통해 배웠다. 여섯 살 나의 한글 공부 포스터는 예순아홉 엄마의 전단지와 같은 걸까. 오랜만에 간 친정집에서 엄마가 공들여 전단지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많은 생각이 스쳤다.
능숙하게 쓰고 읽을 줄 몰라도 엄마가 69년 평생을 누구보다 열심히 잘 살아왔다는 것을 내가 안다. 하지만 엄마가 글자를 알았다면 더 잘 살 수도 있었다는 것도 안다. 내가 보낸 문자도 읽었을 것이고, 길거리에 안내판과 표지판을 보고 차를 탈 수도 있었을 것이고, 티브이 속 뉴스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삶의 반경을 넓혔을 것이고 어쩌면 평생 주부로 살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과 딸이 아니라 본인을 위해 쓰고 읽고 가꾸었다면 조금 다른 인생이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때는 엄마가 한글 교실을 다니거나 집 근처 노인복지관의 수업을 듣기를 원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싫다고, 괜찮다고 하셨다. 그때는 그 모습이 속상했지만 이제 와 보니 꼭 그럴 일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엄마의 선택이고 나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엄마는 웃으며 말한다. 이런 거 몰라도 잘만 살았다고. 맞다. 엄마는 잘 살아오셨고 또 잘 살아가실 것이다. 그러니 나도 엄마가 한글을 잘 모르는 것에 까마득해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지내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와 함께 전단지를 살펴보고 공부하듯 마트 세일 품목과 중국집 메뉴를 읽어보며 그렇게 엄마의 삶에 우선순위로 필요한 단어들을 알려드리는 일 아닐까. 그것이 엄마의 생에 필요한 글자 같다. 내가 엄마의 삶을 재단하지 않고 이해하는 방법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