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판적일상 Sep 10. 2021

정치인들이 떠드는 '청년', 대체 누굴 말하는 걸까?


최근의 정치 트렌드 중 하나는 누가 뭐래도, '청년' 문제에 대해 앞다퉈 말 얹기가 아닐까 싶다. 


이대남 현상, 청년 실업, 출산율... 이런저런 청년 이슈들이 터질 때마다 상대 진영을 공격하며, 마치 '깨어있는' 정치인인 것처럼 참 쉽게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누구는 청년들을 위해 돈을 좀 쥐여준다고 하고, 또 누구는 청년들을 위해 부동산 제도를 손 보겠다고 하고, 또 누구는 청년들을 위해 군 월급을 올려준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각 당에서 대선 레이스가 한창이다. 각 당 대선 후보들은 저마다 화려한 청년 정책을 자랑하며 자신들을 홍보하기 바쁘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다. 


그들이 떠드는 문제의 주체인 '청년'. 그 '청년'은 대체 어떤 모습을 가진 실재를 일컫는 것인가. 


출근길 아침, 20대 노동자가 작업 중 추락해 숨졌다는 씁쓸한 기사를 접하며 생각한다. - '백신 접종에도 쉬지 못하고 출근했는데.. 20대 노동자 작업 중 추락사(기사 링크: https://news.v.daum.net/v/20210910043135712)' - 




구의역 김 군, 김용균 노동자를 비롯해 최근 몇 년 동안만도 몇 명의 청년들이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나. 그때마다 정치인들은 앞다퉈 그들을 조문했고, 추모했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청년이 잘 사는 국가를 만들겠다며,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고 정책을 논의한 것도 청년이 아닌 그들이지 않았나. 그런데 한 청년이 또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다. 이 책임은 또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나는 또 생각한다. 그들이 떠들던 '청년'의 모습은 인간 한 명 한 명으로서의 실재가 아닌 뜬구름 같은 '현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이 '청년'이라는 존재를 그냥 매일매일 숨을 쉬고, 이런저런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는 '실재하는 존재'로 여겨주었더라면, 같은 문제가 계속 발생했을까? 갈등은 계속 벌어지기만 했을까? 





정치인들은 '청년'을 이야기함으로써 '청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프레쉬함을 자신의 이미지에 더하기를 원한다. 젊다는 것이 주는 신선함, 진보적임, 생동감, 깨어있는 시선...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청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런 허상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정당에서 몸 담으며 느꼈던 나의 아쉬움 중 하나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선거나 정책 홍보 등을 기획할 때, 중년 이상의 결정권자들 중 '청년'이라는 단어를 넣고 싶어 하는 경우가 몹시 많았다. 결론적으로, '청년'이란 단어가 주는 이미지를 자신들의 정치에 부여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별다른 게 아니다. 마냥 신선하고, 생동적인 존재인 것도 아니다. 생계에 찌들어 신선하지(?) 못한 청년도 있고, 진보적이지 못한 청년도 많다. 그저 조금 젊은 나이를 가진 실재하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청년'이란 특정한 세대가 짊어진 문제들을 집중하여 해결하려는 시도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론 진정한 문제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 청년의 실재를 마주하고, 청년이 짊어진 현실적인 최우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품 파는 노력을 들여야만 한다.


청년이 어디에서 죽어가는지, 어떤 공간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목놓아 부르짖는지. 현장으로 나와 실재하는 목소리를 듣는 그런 정치인을 원한다. 


대선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더 이상 진부한 정치 공방을 마주하고 싶진 않다. '청년'의 이름이 가진 이미지를 빌릴 필요 없는, 진짜 프레쉬한 대선 후보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릴레오 북스를 시작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