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오랜 인연이 있는 선생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그저 가벼운 수다를 떨려나 보다 했다. 시댁과 친정 이야기, 돈을 빌려줬다 못 받은 사연까지 한참을 돌아가던 서론의 끝은 결국 아들의 의대 합격 소식이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축하합니다”라는 말이 선뜻 튀어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일단 축하부터 건넸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사실 그분은 평소 의사인 내 딸과 두 사위를 무척이나 부러워하셨다. 만날 때마다 자식 농사 잘 지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분이었기에, 본인 아들의 합격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나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간절하고 들뜬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축하 인사가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분의 아들은 서른 중반을 넘긴, 내 큰딸과 동갑이기 때문이다.
내 큰딸은 지방 국립대 학부를 거쳐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 4년을 포함해 8년을 공부한 뒤 전공의가 된 고단한 케이스였다. 전공을 한 번 바꾸고, 의대 증원 사태로 인한 전공의 사직이라는 힘든 시기까지 온몸으로 겪어냈다. 그 와중에 두 아이를 낳아 길렀고 최근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다행히 올겨울이면 전문의 시험을 거쳐 길고 길었던 수련 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지인의 아들로 말하자면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서 이미 연봉 1억을 찍은 엘리트다.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미래의 임원 후보이자 촉망받는 인재라고 들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른 중반을 넘긴 나이에 돌연 이름도 밝히길 꺼리는 지방 의대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니. 의대 열풍이 급기야 그에게까지 번진 것인가.
내 딸과 사위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니, 왜 그랬대요? 그 황금 같은 직장을 버리고 돈도 안 되는 의사가 되려 하다니요.” 공중보건의로 군 복무 중인 사위도 거들었다. “의대 나오면 무조건 돈 번다는 건 이제 옛말이에요. 시대착오적인 선택이죠.” 서른 중반을 넘긴 나이에 시작하는 의대 공부가 얼마나 고될지에 대한 우려도 뒤따랐다.
“그래도 똑똑하니 의대 공부도 잘 해내지 않겠니?” 나의 조심스러운 낙관에 딸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의대 공부는 논리나 타당성을 따지는 학문이 아니에요. 방대한 양을 무조건 머릿속에 집어넣는 ‘절대 암기’의 영역이죠.
서른 중반의 나이에 그 가혹한 암기량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설령 무사히 마친다 해도 마흔이 넘을 텐데, 어느 병원에서 나이 많은 신입을 전공의로 받아주겠어요.
나는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요즘은 백세 시대라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니”라며 지인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 아들은 전공의 과정 없이 학부만 마치고 일반의로 취업할 계획이며, 예전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부모가 진로 지도를 잘못해서 그리된 것이라 했다고 말이다. 지인의 결정을 어떻게든 대변해주고 싶어 진땀을 빼는 나를 향해 딸의 일침은 가했다.
“최고의 대학을 나와 최고의 대접만 받던 사람이 시중의 작은 병원에서 일반의로 취업해 늦은 나이에 궂은일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아마 오십 넘으면 대기업을 나와야 한다는 불안감에 ‘라이선스’ 하나만 보고 뛰어든 모양인데, 그 대가가 생각보다 가혹할지도 몰라요.”
‘라이선스’라는 말에 남편의 얼굴이 겹쳐졌다. 회계학을 전공한 남편은 젊은 날 회계사 자격증을 따라는 내 권유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촉망받는 사원이었고 승승장구했다. 이후 사업에 도전했으나 그리 성공하지 못했고, 뒤늦은 쉰아홉 살에 감정평가사 시험에 도전했다. 일 년에 고작 이백 명 남짓 뽑는, 육십 대 합격자는 극히 드문 험난한 시험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조건을 걸었다. 건강을 생각해 딱 3년 안에 끝내달라고. 사실 내 속마음은 더 처절했다. 나도 늙어가고 있고 자식들도 결혼시켜야 하는데, 내가 매일 가방 들고 밥벌이하러 나가는 동안 늙은 남자가 집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꼴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남편의 가능성을 믿고 평생을 응원해 왔지만, 나 홀로 용쓰며 두 딸을 공부시키고 눈물로 버텨온 세월에 한계가 온 것이다. 여기서 더 뒷바라지를 하다가는 내가 먼저 병들어 죽을 것 같았다.
남편은 미친 듯이 공부했지만 정말 아쉽게 탈락했고, 나는 냉정하게 중단을 선언했다. 남편은 서운함에 일주일간 전국을 방랑하다 돌아와 마음을 정리했다. 하지만 3년의 공부는 헛되지 않았다. 그때 쌓은 지식은 지금 그의 부동산 중개 업무를 훨씬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역시 공부한 것은 어디 가지 않는다.
누구처럼 ‘9수’라도 한다면 언젠가는 합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 인한 기회비용이 너무 막대하다면 재고해야 한다. 사십 대 중반에 도전해 8년 만에 감정평가사에 합격한 내 남동생의 경우처럼 말이다. 동생은 마침내 라이선스를 따냈지만, 공부하는 긴 세월 동안 무너진 가족의 유대까지는 회복하지 못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간절히 원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용기는 가상하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그 선택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나의 목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면, 그 길은 ‘꿈’이 아니라 ‘욕심’ 일지도 모른다.
지인의 아들에게 건네지 못한 축하 인사는 결국 이런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이선스라는 화려한 껍데기보다, 그가 잃어버릴 수 있는 서른 중반의 눈부신 일상들이 내심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지인의 마음을 헤아려 축하 인사부터 건넸어야 했다는 뒤늦은 미안함이 남는다. 목표를 수정하는 것도, 때로는 멈추는 것도 삶을 대하는 또 다른 용기임을 나는 이제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