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내 나이 어느덧 예순하나가 되었다. 이른바 환갑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 나이에 자식들이 모두 제자리를 잡고 결혼까지 하여 자녀들까지 둔 경우는 드무니, 성격 급한 내게 꼭 맞는 결과가 아닌가 싶다.
나는 1989년, 친구들이나 동료들에 비해 다소 일찍 결혼했다. 스물여섯, 나 자신조차 주체하기 힘든 나이에 아내이자 엄마가 되었고, 육아와 교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부유한 집안의 남편을 만나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나는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아이들의 소음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최대한 빨리 이 지옥 같은 학교를 탈출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생계가 빠듯했고, 시댁이나 친정 어디에도 기댈 언덕 하나 없는 처지에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 신분을 내던질 용기는 없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 아니어서인지 교직에 대한 애정보다는 버거움이 컸다. 발령 첫날부터 수업이 너무 많다며 사표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37년째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나를 오래 지켜본 지인들이 나를 '웃기는 짬뽕'이라 수군대도 할 말이 없다.
최근 연금 개혁 소식에 동료들은 앞다투어 학교를 떠나고 있지만, 나는 교감이라는 감투를 쓴 채 여전히 '탈출'을 꿈꾸며 버티고 있다.
연금공단 앱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퇴직금과 연금 액수를 확인하고, 매년 일정표에 퇴직 날짜를 입력해두지만 올해도 나는 소원을 성취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덕분일지도 모른다. 학교를 떠날 온갖 핑계를 억누르며 학생들 교육에 최선을 다했더니, 우리 집 두 딸도 별일없이 잘 자라주었다.
네 살 터울의 자매는 각자 서른이 되기 전 제 짝을 찾아 결혼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꺼린다는데, 우리 부부가 금슬 좋은 롤모델이어서 그랬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다.
우리 부부 역시 갈라서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수 차례 굴곡을 겪었고, 각자 강한 성깔 때문에 서로 물러서는 법을 배우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혼 도장은 찍지 않았고, 예순이 넘은 지금은 한 방에 자며, 언제나 손잡고 산책가는 인생의 '베프'로 정착했다.
그 인내의 보상일까, 두 딸은 각자 바랐던 전문직을 가졌고, 내 유전자를 빼닮은 듯한 손녀들이 경이롭게 자라고 있다.
주변에서는 대단한 자식 농사 비법을 묻는다. 하지만 정작 나는 할 말이 없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두 딸을 키워낸 지난 세월은 마치 석기시대의 역사처럼 기록 하나 남지 않은 채 까맣게 잊혔기 때문이다.
이제야 수십 년 전의 기억의 경계를 넘어가 본다. 가슴속에 응어리로 맺혀있던 돌덩이를 살살 구슬려보니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먼저 고개를 든다.
하지만 한번 열어버린 기억의 마개는 탄산 거품처럼 솟구쳐 더 이상 누를 길이 없다.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숙제였고, 외면하기엔 너무나 소중한 나의 대하소설이기 때문이다.
글이 넘쳐나고 글 읽는 사람도 드문 시대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엮어서 뭘 할 작정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첫째, 내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의 내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고 싶다.
둘째, 나의 서툰 경험이 이제 막 육아를 시작하는 젊은 엄마들에게 작은 힌트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와 같은 시대를 견뎌온 부모들과 전우애를 나누며 찐하게 공감하고 싶다.
"저는 이렇게 살았답니다. 참 힘들었지만, 그래도 잘 버텼지요? 당신은 어떠셨나요?"
미숙한 글을 세상에 내놓는 용감한 나를 스스로 칭찬하며, 떨리는 두 손을 키보드 위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