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육아시간이 있었다면

by 해림

출산 며칠 후 산부인과 병원을 나서는 나에게 아기가 안겨졌다.


"당신 아기니까 데리고 가서 알아서 키우세요"라는 준엄한 선고 같았다. 내 나이 스물일곱. 첫아기를 낳았는데 포대기에 싸인 핏덩이를 받는 일이 왠지 어색해 머뭇거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큰시누이가 "아이고, 예쁘네"라며 달랑 품에 안아 올린 후에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대학 졸업 후 스물셋 철부지는 일찍부터 선생 노릇 하느라 매일 좌충우돌 실수 연발이었다. 사회생활도 모르는 신출내기가 남들이 하는 어른 놀이를 따라 한다고 결혼하고 출산까지 했으니, 무엇 하나 똑바로 하는 일이 없었다.


서점에서 산 육아서를 읽으며 나름대로 대비는 했다. 하지만 산후조리원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 수유도 몸 관리도 제대로 배울 길이 없었다. 주변에서 주워들은 정보로 얼렁뚱땅 '육아라는 전투'를 벌이던 시절이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 교사로 근무에 바쁘셨고, 시어머니 역시 생계를 위해 직장에 다니며 다섯이나 되는 딸들을 상대하느라 버거워하셨다.


기댈 언덕 하나 없는 광야에 나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나는 무늬만 엄마였다. 요즘 TV에 등장하는 '고딩 엄마'들보다 정보가 없는 쌩초보였다.


최근 방송에서 편식하는 아이에게 놀이로 채소를 먹게 하는 장면을 보았다. 브로콜리를 강아지처럼 쓰다듬게 하고 꽃송이처럼 냄새 맡게 하여 아이가 채소를 사랑하게 만드는 모습은 내게 경이로운 발상이었다.


나는 이런 방법을 생각조차 해내지 못했었다. 입이 짧았던 나의 두 딸은 좀처럼 잘 먹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현명하게 대처할 여유가 없었다. 밥 귀한 줄 알도록 며칠 굶기라는 친정엄마의 호통과 달리, 나는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소시지나 햄이라도 구워 들고 온 집안을 따라다니며 먹였다.


한 숟가락이라도 먹여야 감기약을 먹일 수 있고, 제시간에 열이 내려야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학교로 출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편도염으로 열이 펄펄 끓거나, 연신 토하는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그 무거운 발걸음. 출근해서도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그 불안한 심정은 오직 그 길을 걸어본 엄마들만이 안다.


요즘 육아 전문가들은 '금쪽이'들을 단 몇 주 만에 순둥이로 바꿔 놓는다. 나는 그런 비법을 알지도 못했고, 먹고 사느라 지쳐 교육적인 양육법을 공부할 틈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공부할 생각을 못했다고 해야 맞다.


명색이 교사였지만 사춘기를 겪는 내 새끼가 내 인내심을 시험할 때면 체통 없이 엉엉 울기만 했다. "자식이 나를 사람으로 만들 모양이다"라며 괴로워했을 뿐이다.


아이를 혼낼 일은 많았지만,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아이들이 가엾어 결국 내가 양보하고 잘못된 행동조차 수용해 버리곤 했다. 화내고 쥐어박고 야단을 치면서도 일관성 있게 가르치지 못했다.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학원 셔틀을 마치고, 아이들이 잠든 뒤에야 밤새워 집안일을 했다. 늦게라도 한숨 붙여야 다시 내일이라는 전쟁터로 나갈 수 있었다.


이 처절하고 눈물겨웠던 양육의 역사는 사실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간' 탓이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요즘 젊은 동료들처럼 하루 두시간 '육아시간'이 보장되었다면, 나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새로 아이를 키우라고 해도 거부하지 않을 것 같다.


그 한 시간만 있었다면, 편식이 심한 큰딸에게 화내지 않고 다정하게 밥을 먹였을 텐데. 열나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가 여유 있게 유치원에 보내줬을 텐데.


둘째 딸이 이른 아침 유치원 문 앞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늦은 시간까지 용변 묻은 속옷을 입은 채 컴컴한 유치원 운동장에 덩그러니 남겨져 나를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일찍 퇴근해 아이들을 데려와 따뜻한 물로 씻기고 마음껏 안아줬을 텐데.


지나온 세월이 후회되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못다 준 그 한 조각의 시간이 못내 한으로 남아서, 나는 정말이지 지금의 세상이 너무나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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