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소리가 무서운 할머니

by 해림

손녀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현관에 들어섰다.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딸 부부가 황급히 따라 들어왔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선 원망이 피어올랐다. '다친 아이를 왜 하필 내게 데려왔을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의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했다. 그 소리는 나를 지독한 불안과 슬픔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내 아이들이 어릴 때도 떼를 쓰며 울기 전에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곤 했다. 버릇이 없어질지언정 울리지 않는 편을 택한, 완전히 틀려 버린 육아법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큰딸 부부는 달랐다. 아이가 울어도 끝까지 상황을 이해시키고 스스로 이겨내도록 기다려준다. 물론 그 끝엔 따뜻한 포옹이 있다.


"선생이라는 여자가 자식을 그리 오냐오냐 키웠냐"는 세상의 비난이나, "엄마는 왜 나를 그렇게 키웠어?"라는 딸들의 물음 앞에 나는 할 말이 없다.


나의 이 유별난 불안에는 뿌리가 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4형제를 가사 도우미들에게 맡기고 출근하셨다. 담배를 피우다 이불에 불을 낸 할머니부터 야간 학교에 다니던 고등학생까지, 나의 유년기는 제대로 된 돌봄 없는 임시방편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TV 강연자의 상담 내용을 듣다 '유레카'를 외쳤다. 나를 괴롭히던 '울음소리 트라우마'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엄마 없는 집에서 들어야 했던 동생들의 울음소리, 막내 동생이 다쳐 피를 흘리는데도 학교에 계신 엄마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던 처참한 기억들.

거기에 병든 아버지의 응급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어린아이의 무력감이 더해져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결핍은 나를 지독한 '해결사'로 만들었다. 위급한 상황을 견디느니 차라리 내가 모든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말끔히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 대가는 늘 고달픈 몸과 마음이었다.


나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불안'이라는 끈으로 아이들을 단단히 묶어두었다. 딸들이 자랄 때까지 물리적으로 손을 놓지 않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감시와 잔소리, 과잉보호로 그 끈을 유지했다.

위험하다는 핑계로 대학생 딸의 아르바이트조차 금지했다.


작은딸의 고교 시절, 나는 등하교는 물론 야간 자율학습 감독까지 자처하며 딸과 밀착해 보냈다.


큰딸이 학원을 마칠 때면 차를 대놓고 진을 치며 기다렸다. 혹여나 반항하는 딸이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시간들. 그 모든 과잉은 내 심장에 박힌 불안의 파편들이 시킨 일이었다.

이제는 놓아야 할 '객체'로서의 딸들

작은딸을 서울로 유학 보내던 날, 역에서 헤어지며 딸은 내게 편지와 함께 과외로 번 돈을 건넸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부모상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몇 시간을 울었다. 이제는 정말 딸의 손을 놓아야 한다는 허전함과 불안이 나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불안과는 무관하게 딸은 당당히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작은딸은 로스쿨을 거쳐 검사가 되었고,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소아과 전공의였던 큰딸에게 "두 돌 아기는 밖에서 손을 꼭 잡아야 한다"며 슬쩍 훈수를 두다가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자'던 남편과의 맹세를 떠올리며 입을 다문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불안의 불꽃이 이글거린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나의 불안이 딸들에게 전염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딸들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나에게서 독립한 온전한 객체다.


불안을 핑계로 뻗치던 오지랖을 거두고, 나를 옥죄던 끈을 비로소 내려놓는다.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딸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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