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손녀의 버르장머리가 완전히 가출해 버린 날이다.
큰딸이 퇴근하기 전, 혼자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고군분투 중일 사위가 안쓰러워 시키지도 않은 ‘출동’을 감행했더니 집안 분위기가 살벌하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평소 점잖기로 소문난 사위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사연인즉슨, 첫째 손녀가 보행기를 강탈해 타고 다니며 기어가는 동생의 손가락을 밟고 지나가려던 찰나였단다.
사위도 오죽했으면 소리를 질렀을까 싶어 못 본 척 넘어가려 했지만, 오늘따라 손녀의 심기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뒤틀려 있었다. 할머니인 나에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녀석을 보며 나는 속으로 칼을 빼 들었다. ‘요놈 봐라? 동생에게 사랑을 나눠 주느라 힘들겠지만, 오늘 할머니한테 제대로 한 수 배워야겠다!’
우선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간지럽히기’ 필살기를 쓰며 슬쩍 제안했다.
“우리 역할 바꾸기 놀이 할까? 지금부터 내가 네가 되고, 네가 할머니가 되는 거야!”
아이는 금세 흥미를 보이며 내 연기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버릇없는 아이 연기를 리얼하게 선보이며 손녀를 슬쩍 골탕 먹였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마주한 아이의 표정이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다음 작전은 독서 역할극이었다. 공주 책을 가져오면 읽어주겠다고 하니, 아이는 나를 곤란하게 하려고 장난을 건다. 뜬금없이 담요 한 장을 들고 와 “이게 책이야, 읽어줘!”라며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며칠 전 읽어준 백설공주 내용을 담요 위에 펼쳐놓듯 조곤조곤 읊어 내려갔다.
작전은 적중했다. 아이는 일곱 난쟁이의 집에서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백설공주로 완벽하게 변신해 얌전히 누워 고분고분한 연기를 해냈다. 내친김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 ‘신데렐라’, ‘인어공주’까지 섭렵했다.
나는 기꺼이 나쁜 왕비와 못된 새엄마, 바다 마녀 역을 자처하며 공주님을 괴롭혔고, 파스타를 만들던 사위는 결정적인 순간에 ‘왕자님’으로 등판해 뽀뽀로 공주를 깨우며 화려한 결혼식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밥 안 먹는 공주님은 왕자님이 뽀뽀 안 해준대!”
그 말 한마디에 식탁 거부 시위를 벌이던 아이가 스스로 숟가락을 든다. 사위는 “장모님, 아이 보는 솜씨가 이제 경지에 오르셨네요!”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두 아이를 동시에 돌보며 1인 4역 연기까지 해내는 장모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표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칭찬은 위험하다. ‘경지에 올랐으니 더 자주 봐달라’는 속뜻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단호하게 경계해야 한다.
딸의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몸이 휘청한다. 너무 열정적으로 악역을 연기한 탓에 현기증이 일고, 마녀 목소리를 내며 온 힘을 쏟았더니 목까지 잠겨버렸다.
오늘 하루는 손녀의 기를 꺾고 버릇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내 몸이 지쳐 앞으로도 매번 이런 식의 육탄전을 벌였다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다음에는 좀 더 영리한 작전을 짜야겠다. 나는 덜 힘들면서도 손녀가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그런 묘수 말이다. 젊은 시절 내 아이를 키울 때는 정신없이 소리 지르기 바빴지만, 이제는 관조할 줄 아는 할머니 아닌가. 큰소리 내지 않고도 아이의 버릇을 우아하게 고쳐놓는 전략, 할머니로서 반드시 그 지혜의 정점을 찍고야 말겠다.